최근 심리 용어인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흔하게 쓰이고 있다.
가스라이팅 용어의 유래는 1938년 패트릭 해밀턴이 연출한 스릴러 연극 가스라이트(Gaslight)에서 시작되었다. 연극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보석을 훔치기 위해 이웃 부인을 살해한 남편 잭이 보석을 찾기 위해 윗집 가스등을 켜면 가스를 나누어 쓰고 있는 다른 집 가스등이 약해진다. 이에 집이 어두워졌다고 하소연하는 아내에게 무슨 소리냐며 그렇지 않다고 핀잔을 주는 것을 반복하며 아내로 하여금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빠지게끔 만드는 내용이다. 가스라이팅은 이 연극 속 남편의 행동처럼 교묘하게 상대방의 심리를 조작해 상대방이 무력감에 빠지고 자신에게 복종하게끔 만드는 병리적 심리 현상이다.
뭐야. 말도 안 되는 걸로 우기면 나도 따지면 되지!
쉽게 생각해보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된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못 믿나? 분명 등이 어두워졌는데, 분명히 내가 느꼈는데 어떻게 순순히 남편 말에 수긍하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누구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는 반박을 하려고 들겠지만, 문제는 가스라이팅이 매우 교묘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피해자는 본인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가해자는 4단계를 거쳐 피해자를 복종시키는데,
1단계: 관계 형성 "나니까 네 얘기 들어주지"
주로 가스라이팅의 피해는 매우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남.
2단계: 기억 왜곡 "넌 또 왜 자꾸 잘못을 하니"
피해자가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하도록 만들어 없던 일도 있던 일처럼 느끼게 만듦.
가스라이팅의 어원이 되었던 연극 '가스라이트'에서는 아내에게 선물한 물건을 일부러 숨겨 아내가 잃어버린 줄 알고 미안해하는 상황을 만듦.
3단계: 미니마이징 "주변 사람들이 너에 대해 뭘 알아? 내가 더 잘 알지."
2단계를 지나 이성적 판단이 불가하여 가해자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계에 이름.
4단계: 무시 "왜 생사람을 잡아. 쓸데없이 예민하네."
피해자의 말을 모두 무시함으로써 피해자를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함.
(The Gaslight Effect, Dr. Robin Stern 참고)
이미 2~3단계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가해자에게 조종당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단계를 지나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제가 이런 일 당할 줄 몰랐어요.' , '그 순간 제가 뭐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뭐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게끔 치밀하고 교묘하게 사람의 심리를 움직이는데 맘먹고 사기를 치려는 사람에게 절대 안 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가해자들은 사기꾼들처럼 (엄밀히 말하면 사기꾼이 맞다.)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나도 모르게 내 삶을 황폐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작점에 서 있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스라이팅의 징후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일상에서 흔히 겪는 피해의 시작점에서 보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
가스라이팅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주로 가까운 사람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 아끼는 사이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관계를 잘 유지해보려는 노력을 시도하게 되는데, 당신이 혹시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느낌, 생각이 든다면 가스라이팅을 의심해보기 바란다.
이 사람과 있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동안은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 사람과 함께하는 동안은 뭔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고민 고민해서 상대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 것만 같고, 상대방과 다른 의견을 낼 때 상대방의 눈치를 과하게 보게 된다.
자꾸 사과할 일이 많아진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과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이상하게 자꾸 그런 상황들이 생기고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결국 내가 잘못한 걸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모든 일 끝에는 결국 나는 나쁜 사람이 된다.
스스로 너무 예민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갑자기 자신이 예민한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남들은 이런 게 대수롭지 않나? 내가 예민한 건가?라는 생각을 자주함과 동시에 그의 행동이나 말을 마음속으로 합리화시킨다.
가스라이팅 피해의 징후는 다양하지만 위의 세 가지 변화는 특히 초기 단계에도 비교적 쉽게 발견하기 쉬운 징후이다. 소중한 사람이기에 감싸고 싶고 최선을 다해보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이상하게 이 사람과 있는 내 모습이 별로라면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가스라이팅은 '교묘하게'일어난다. 때문에 무언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막연하게라도 들기 시작했다면 앞으로 그 관계를 한 발자국 떨어져 잘 관찰해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 그 사람과의 연을 끊어야 한다고 단정 지어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느낌이 일시적인지 지속적인지는 꼭 파악해 보아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한 사람의 삶을 황폐화시킨다.
지금 당장은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겠지만 나 자신보다 소중한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상대방을 감싸주려고 노력하는 사이 자칫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지게 될 수 있다. 혹시 내가 그 늪에 지금 한 발을 담그고 있진 않은지 잘 생각해보자.
세상에는 함께할 때 나를 더 빛나게 해주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절대 내가 스스로 별로인 사람으로 느끼게끔 가만히 두지 않는다. '정말 괜찮은 당신'에 더해 점점 더 '빛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