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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운 Dec 20. 2019

건축공학자가 고고 유적 발굴 지휘, 왜?

'통섭의 고고학' 현장을 찾아서 上

  흔히 발굴은 고고학 전공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 고고학 초창기 리더랄 수 있는 창산 김정기 박사나 김동현 선생 등은 건축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최근에는 저습지(지형이 낮아 습한 곳) 발굴에서 흔히 나오는 유기물 분석을 위해 식물고고학 혹은 동물고고학 전공자들이 활약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통섭의 시대가 발굴현장에도 열리고 있다. 다양한 전공 학자들이 협력하는 '통섭의 발굴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1970년대 황남대총 발굴현장. 봉분의 단면을 노출시키면서 파내려가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공학도의 시선으로


  황남대총 발굴현장은 한국 고고학계의 산실이라고 부를 만하다. 해방 이후 한국 고고발굴의 태두랄 수 있는 창산 김정기 박사가 발굴단장을 맡았고, 그 아래 김동현 전문위원이 부단장을 맡았다. 두 사람은 한국 고고학계에서 매우 독특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둘 다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고 일본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정통 엔지니어 출신(김정기 박사는 1956년 일본 메이지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에서 공학박사)이다. 역사나 고고학 전공자가 아닌 공학도로서 이들의 독특한 학문 배경은 한국의 초기 고고 발굴에서 진정한 통섭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생전의 창산 김정기 박사(왼쪽)와 2016년 황룡사터를 찾은 김동현 선생(오른쪽)의 모습. 동아일보 제공


  숫자에 약한 사학도들과 달리 이들은 발굴에 수의 개념을 적극 적용했다. 일례로 이들이 작성한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투입된 토사량이나 무덤 축조에 동원된 연인원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치가 포함돼있다. 특히 천마총 발굴 때에는 봉토 단면도를 최초로 그려 넣기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유물을 얻기 위해 봉토를 제거하는 데에만 급급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건축 설계도를 작성하며 사물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훈련을 받은 김정기 단장은 봉토의 단면 구조를 파악해야 신라시대 작업 공정을 재현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1978년 황룡사터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 발굴도 건축공학도가 아니었으면 감행하기 힘든 대역사였다. 당시 김동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아이디어로 포항제철에서 대형 크레인을 공수해 30t 무게의 목탑터 심초석을 들어올린 것. 당시엔 탑의 심초석 아래까지 발굴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석탑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수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구태여 무거운 심초석을 들어내 발굴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1978년 7월 28일 무게가 30t에 이르는 황룡사지 목탑 터 심초석을 당시 포항제철에서 빌린 크레인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황룡사터 심초석 발굴 때에도 일부 학자들은 사고 위험을 거론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건축공학을 전공한 김 단장의 생각은 달랐다. 탑의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가장 아랫부분을 이루는 기초를 조사해야 했다. 오랫동안 정통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영역이다. 최근 들어서야 부여 군수리사지와 왕흥사지 발굴에서 심초석 아래를 발굴 조사했다.


  심초석을 들어올리자 아래는 김 단장의 예상대로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이 깔려 있었다. 평평하지 않은 자연지형에서 거대한 하중을 지탱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신라인들의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예상치 못한 유물의 존재였다. 심초석이 놓였던 자리를 10㎝가량 파내려가자 청동거울과 금동귀고리, 청동그릇, 당나라 백자항아리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한꺼번에 나왔다. 탑을 세울 때 귀족들이 사용하던 장신구를 부처에게 바치는 공양품과 액땜을 위해 땅속에 묻는 예물인 진단구(鎭壇具)였다.

 

경주 황룡사터 전경. 문화재청 제공


  경주 월정교 발굴 때 비계를 세우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을 발견한 것도 김 단장이었다. 신라인들이 井자형으로 비계를 놓은 뒤 그 안을 돌로 채워 다리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헤이조쿄(平城京․고대 일본 나라시대의 수도) 발굴에 고(古)건축 전공자들이 여럿 참여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고고학 이외 연구자들의 발굴참여가 저조한 편이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숨은 공로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해외두뇌 유치 프로그램에 의해 귀국한 화학자로 황남대총 발굴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었던 김유선은 유물 보존처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보존과학 담당 지도위원으로 현장을 방문한 김유선은 금제(金製) 유물 표면에 묻은 때를 제거할 때 소다 가루를 사용하라고 조언했다. 비단벌레 장식을 글리세린에 넣어 보관토록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물리학자로 한양대 교수였던 조종수는 각종 금속유물 보존에 힘을 보탰다.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 2화에서 경주 황남대총 발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h9cj1Q7k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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