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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 변호사 Feb 18. 2021

사랑한다, 사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새봄"

유난하게 깔끔 떠셨던 부모님 덕인지 나는 강아지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남이 키우는 강아지를 데리고 놀거나 하루나 이틀 정도 맡아주는 일은 즐겁게 할 수 있었지만, 온갖 궂은일을 하며 다시 한번 육아를 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안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은 일에 치여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군식구 하나를 더 돌봐야 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요즘은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잠시 중단된 상태이기는 하나 직업 특성상 해외 출장이 잦기 때문에 나 없이 혼자 돌봄을 도맡아 해야 하는 아내의 반대도 크게 한몫을 했다.


더구나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와 나는 굳이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면서까지 누군가를 돌볼 생각 자체가 없었다. 산책길에서 강아지 똥을 줍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저렇게까지 강아지가 좋을까 싶기도 했고, 유난히 사람에게 짖는 반려견을 보면 따가운 눈총을 주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반려견 입양은 우리 인생의 버킷리스트에서 오래전부터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시작은 막내딸이었다. 막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강아지를 입양해 오든지 아니면 자기 동생을 낳아 달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밤마다 잠을 안 자고 설치는 아이들을 달랠 요량으로, 있지도 않은 셋째 이름까지 지어가며 “너희들이 일찍 자야 동생이 생길 것 아니냐”는 농담으로 대충 때우던 것이 점점 일을 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나는 약속을 안 지키는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밤마다 막내딸의 성토를 가만히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듣다 보면 틀린 말도 별로 없다.


반려견을 키우는 것이,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보라는 의미에서 애견 카페라는 곳에도 데려가 보았다. 이 경험은 반려견 입양은 우리 취향이 아니라는 믿음을 굳건히 하게 했지만, 오히려 막내딸에게는 그 열망을 더 키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오빠까지 가세하면서 기세가 등등해진 딸은 본인이 밥도 챙기고 목욕도 시키고 똥도 치우고 모든 일을 다 하겠다고 때때로 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성화에 못 이겨 주말에 가족끼리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후배 지인의 애견샵을 들렀던 그 날이었다. 반려견 입양은 가정 입양이나 유기견 입양이 더 바람직하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었던 우리였다. 그 당시에는 사료, 밥그릇이나 배변패드 같은 기본적인 준비조차 없었다. 애초부터 키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들어가기 전부터 아이들에게도 절대 데려오겠다고 떼쓰지 말라고, 그냥 한번 보고만 오기로 약속을 받아냈던 나였다.


들어가면서부터 유난히 갈색 꼬물이 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우리 가족을 따라다니며 눈을 맞추고 조그만 혀로 반갑다고 우리 가족들에게 뽀뽀를 한아름 한다. 애견샵 사장도 그다지 권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 주 더 많은 강아지들이 올 것이라고까지 했다. 온통 마음이 빼앗겨 버린 아이들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급기야 아내마저 “우리 집에 갈까?”라고 녀석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이 어느새 갈색 꼬물이 녀석을 차에 태우고 오는 길에 이름까지 지어주고 있었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다. 갈색의 털을 가지고 있어서 “흑당”이라는 이름도 후보에 올랐으나, 내가 제안한 “새봄”이란 이름이 낙점되었다. 아이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새봄이의 뽀시래기 시절

이 이름에 대해서 여러 반응들이 있었는데, 강아지에게 왜 사람 이름을 붙였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새봄이의 깜찍한 외모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사랑과 기쁨을 부르는 마법의 언어가 되었다.

처음엔 너무 작아서 새봄이가 혼자 꼬물거리면서 이리저리 다니는 것 자체가 대견할 따름이었다. 유난히 겁도 많아서 조그만 소리에도 잘 놀라고, 허겁지겁 밥을 먹어 치우다가 토하기도 하고, 배변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여기저기 실수를 하고 다니는 바람에 약간의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조그만 꼬리를 흔들며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잠들 때가 되면 내 침대로 오는 그 모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야근을 하고 새벽에 귀가하는 나를 굳이 졸린 눈을 하고서까지 일어나 꼬리를 흔들고 반겨주는 새봄이에게 나는 진정한 환대를 느꼈고, 홀로 앉아 근심하고 있으면 어느새 옆에 와서 엉덩이를 착 붙이고 기대는 새봄이에게 따뜻한 위로를 느낀다. 내가 퇴근이라도 하고 집에 오면, 덩실덩실 엉덩이 춤까지 춘다. 웃을 일이 많지 않은 갱년기 아저씨에게 함박웃음이란 선물도 안겨준다. 마치 물감에 물들 듯 우리도 새봄이도 서로에게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새봄이는 이제 자기 이름도 알고 간식, 산책과 같은 몇 개의 단어들은 멀리서도 귀신같이 듣고 달려오는 영악함까지 갖췄다. 우리는 새봄이 없이 여행이라도 가면, 어느새 허전함을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개아빠, 개엄마가 되어 가고 있고, 새봄이에게만은 진심인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어간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듬뿍 물들어가는 것, 어떤 허물도 덮어주고 기다려주는 것, 사랑을 듬뿍 받은 존재는 그 사랑의 크기만큼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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