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죽음이 나에게 남긴 것
말기 암환자였던 아빠가 죽어가는(?) 과정을 아주 가까이서 생생히도 보았던 탓에 나는 사람이 자기 맘대로 죽기는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알고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사지 멀쩡하고 팔팔할때의 얘기지, 내 팔다리를 내 맘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맘 먹은 것처럼 되진 않는다.
아빠는 간경화를 거쳐 간암환자로 몇년을 지냈는데도 내내 입에 술을 댔다. 댄 정도가 아니지, 술을 들이부었다. 암환자가 아닌 사람보다 더 많이 먹었으니 말 다했지 뭐. 아빠는 가족들이 걱정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술 마음껏 먹다가 갈꺼야. 술 안 먹고 오래 사느니 난 그냥 맘편히 먹다가 저세상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가 말년에 고생한다는 우리의 말에도 '걱정말아라. 그러기전에 내가 스스로 알아서..' 까지 나오면 우리는 '이 아부지가 딸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으시네!'하며 아빠 입을 막았다.
아빠는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항암약 부작용으로 간성혼수를 겪었고 그 이후 회복하지 못했다. 서서히 임종을 향해가는 시간에 올라탄 아빠를 호스피스에 모셨고, 아빠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끝은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맞이한게 어쩌면 행운이라고 난 생각한다. 연명치료를 하기로 결정했다면 아빠는 무수히 많은 주사와 관들을 온몸 여기저기에 꽂고 중환자실에 갇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이승에 묶여있다가 지쳐 떠났겠지.
아빠를 떠나보내며 나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나의 마지막엔 누가 내 곁에 있을까. 나의 마지막을 내가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해놔야겠다는 생각을 그 당시에 했었는데 본인이 직접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을 방문해야 하는 일이라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거 작성하겠다고 직장인이 피같은 연가(연차)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을 그만두고 한번 시간내서 작성하러 가봐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동네에 있는 노인복지관이 올 5월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으로 지정이 된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현수막을 보고 알았다. 원래는 아산병원에 가서 하려고 했었는데 역시 나는 운이 좋다.(라고 최면을 걸어보다.)
짧은 시간이지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하고 1:1로 작성을 해야해서 예약이 필요했다.
7월 중순에 연락했는데 거의 한달 후에야 예약이 되어서(그 예약일이 8.22) 어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하고 왔다.
그래도 가기전에 남편에게 말해야할 것 같아서 메시지를 보냈더니 자기랑 같이 가서 하자고 한다. 난 이미 예약해서 가야하니까 당신은 따로 예약해서 해~하고 나 혼자 했는데 내가 너무 냉정한 부인인가. ^^;
시간이 맞춰 노인복지관에 가서 상담실에서 어떤 어르신과 함께 소수정예(?)로 짧게 교육을 받았다. 그 어르신이 나를 보고 대뜸 젊은 사람이 이게 뭔지 알고 벌써부터 쓰냐고 나이가 몇살이냐고 물으셨다. 모르는 사람한테 나이는 왜 묻는건지... (그럼에도 대답한 나. -_-)
*사전연명의료의향서
19세 이상 성인이 향후 자신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연명의료중단등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로 작성한 것
나는 혹시나 내가 아직 젊었을때 사고가 있거나 해서 병원에 실려갔을때 제대로 치료를 안해줄까봐 그게 걱정되었는데 교육을 받으니 그런게 아니라 '임종과정'에 있을때의 연명치료를 말하는 것으로 그 임종과정이라는 것은 임의로 결정하는게 아니라 정해진 기준에 따라 전문가(의료진)들이 판단하게 된다.
*임종과정에 대한 판단
누가: 담당의사와 전문의 1인
어디서: 의료기관 윤리위원회가 있는 의료기관
무엇을: 해당 환자가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를 받더라도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인지 판단합니다.
등록을 하면서 서명을 두차례 정도 하는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오늘 이 결정이 내 생의 마지막을 좀 더 이롭게 해줄련지. 내가 가고 싶을때 갈 수 있게 해줄련지. 그날이 오면 오늘의 이 결정을 만족할지, 후회할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이 잠시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 선택을 가족들이 열람가능하도록 해두면 열람도 가능하다고 해서 열람동의도 했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나의 임종과정이 왔을때 내 연명치료거부의사를 열람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하는 생각에 그날이 눈 앞에 그려져서 갑자기 울컥하기도 했다. (나이들어도 상상력이 계속 너무 풍부해서 탈이다.)
죽을 때가 되면.. 뭐 하나라도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억지로 치료 안 받고 편히 가고 싶어서 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고 왔다. 그 날이 오기전에 한번쯤은 미리 생각해두는 것도 나중에 갑작스럽게 일이 닥쳤을때 덜 당황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아서... 나는 사실 스위스의 안락사(조력자살) 제도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한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시대이니 나의 마지막은 병원에 누워서가 아니라 내가 결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