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 지지, 난 정말 서울 밖에서 사는 것에 대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생 때 나는 서울 아니면 안 되는 소녀였고, 20대 내내 서울에서 살면서도, 서울살이가 그렇게 힘들었으면서도 내 미래에 서울 이외의 도시는 한 번도 없었다?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지지를 바라본다.) 근데 요즘 그 시간들을 통과해서 이전의 삶을 돌아보면 어떤 덫에 걸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주말마다 새로운 카페나 식당을 갔잖아. 놀랍게도 매주 새로 갈 곳들이 넘쳐났고, 가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거나 놓쳤다는 기분이 들었어. 마땅히 의미도 없이. 마치 세일하는 물건사면 돈 번 것 같은 기분 같은 거 (웃음) 왜 릴스를 한번 보기 시작하면 중간에 끊지 못하고 한자리에 계속 몇 시간이고 앉아서 보게 되잖아. 그런 것 같은 무의식적 반복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게 재밌기도 하고, 가끔 정보도 주고, 또 가끔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막상 그렇게 내 삶에 의미 있는 것들이 아닌 점마저도 똑같아. 새로운 팝업 스토어, 공연, 전시, 카페, 식당, 술집이 넘쳐나는 서울은 정말이지 사람을 게으르지 못하게 하는 곳이야. 근데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고작.. 정말 고작 몇 개월 살았는데, 틈하나 없을 것 같던 생각들 사이로 알 수 없는 질문 같은 것들이 막 삐져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야. '이 모든 걸 누릴 수 없는 곳에서 살아도 괜찮을까? 그 삶은 유용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내 삶은 서울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짓게 돼. ('정말'을 강조하며) 정말 놀라워. 정말 살아있는 기분이 들어.
지지 : 응, 사실 나도 요즘 비슷한 걸 느껴.
로이 : (화들짝 놀라며) 거짓말. 정말? 네가?
지지 : (웃음) 그러게 말이야. 내 삶에서 어떤 것보다 그렇게 성실했던 적은 없었을 거다. 너 알지? 내 네이버 지도에 샵이랑 식당, 카페 저장해 놓은 포인트 핀 때문에 지도가 안 보였었잖아. (멋쩍은 웃음)
로이 : (깔깔대며) 어, 맞아. 심지어 다 가지도 않고, 간 곳 기억도 못하면서.
지지 : (웃음) 그러게 말야. 인스타에서 새로운 샵들을 서칭 하는 게 사실 내 취미 아니었을까 싶었을 정도니까. 그런데 모든 곳이 매번 백 퍼센트 만족스러울 수는 없지만, 꽤 높은 수준으로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하니까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진짜 쉽지 않아. (나뭇가지로 모래사장 위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한다.) 그런 점에서 난 한국사람들 존경스럽기도 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변하는 유행에 이렇게 빠르게 반응하고, 높은 퀄리티로 구현해잖아. 정말 다들 열심히야. (너털웃음을 짓는다.)
지지 : 사실 그런 복지(?)를 마다할 이유도 없으니 (피식 웃으며) 최선을 다해 누렸지.(바오와 마주 보며 웃는다.) 지금은 정말 감쪽같이 그런 것들이 쓸모없게 느껴져. 계획을 가지고 서울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조금씩 마음을 다져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마치 어떤 저주가 풀린 사람처럼 그냥 문득 다른 곳에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내가 살 곳이 서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쳐. 진짜 신기해. 이게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로이 : 글쎄.. 나이가 의미 없을 순 없겠지만 그런 마음의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지지 : 음.. 맞아. 나이는 잊자 ( 로이의 어깨에 잠시 기대다 고개를 다시 번쩍 들어 로이를 바라본다.) 그런데 우리가 비슷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고 있다는 게 좀 놀랍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걸 겪어도 각자 다르게 느끼는 게 당연하고, 더군다나 너랑 나는 성향도 너무 다르잖아. 전혀 의심도 못해봤어. 대체 언제부터 느꼈던 거야.
로이 : 나도 뭐.. 너랑 비슷하지 않았을까. 절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것들의 부재 속에서 지내다 보니까 의미 없는 집착이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고, 그 생각이 확신으로 향하고.. 네 생각의 흐름이랑 비슷하게 흘러간 것 같아. 나도 지금 내 변화가 신기해. (수줍은 웃음) 그리고 재밌어. 나는 아마 여기가 좋은가 봐.
지지 :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로이를 한참을 바라보다 피식 웃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