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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L POSTINO Jul 04. 2020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헤르만 헤세, 『크눌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중략)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김현, 2009(1977)「2.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국 문학의 위상』, 문학과 지성사: 28.



본 글은 이노은 역의 민음사 판을 기준으로 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는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의 세 단편 소설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림은 헤르만 헤세가 그린 수채화이다. (1919)



크눌프는 이곳저곳을 떠도는 방랑자이다. 그는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다른 이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그들이 자기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는 한 곳에 정착하여 자리를 잡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된다. 사람들은 그의 삶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기도, 한편으로는 부러움과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은 그가 그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가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에서 크눌프는 화자인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눌프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뿐 아니라 슬픔 또한 느끼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아름다움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일 것이나, 그럴 경우 그것을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게 되고 기쁨과 동정심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불꽃놀이를 예시로 든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즐거움과 그것이 이내 사라진다는 두려움의 양가감정을 동시에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이 두 감정은 서로에게 연결된 것이며 그렇기에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화자 '나'는, 결혼 혹은 우정과 같은 것은 꼭 그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크눌프는 하지만 거기에도 종말이 오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정과 사랑을 망가뜨릴 요소가 많은 까닭이다. '나'는 이 말을 수긍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종말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크눌프와 그런 우정을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나'는 본인의 말처럼 종말을 생각하지 못하다가, 크눌프의 말처럼 종말을 맞게 된다.

 


크눌프는 모두가 자기의 영혼을 가지며, 그것을 다른 사람과 섞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영혼을 꽃에 비유한다.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다.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로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만 그것은 제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다.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저곳으로 불어댈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꿈에서 한 여인을 본다. 그 여인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 헨리에테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헨리에테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또 다른 여인인 리자베트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세히 보니 리자베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크눌프에 따르면, 그 자신이 그녀들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을 한때 사랑했고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녀들과 비슷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꿈속의 형상이 되어 그녀들이 자신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 형상은 크눌프의 소유가 되었지만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인간일 수밖에 없다. 서로의 존재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으로나마 간신히 건너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길을 가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크눌프의 의견에 반박하며, 자신의 그의 영혼을 이해하고 그의 삶에 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실패한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의 영혼을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그가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억압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억압은 모든 종류의 억압을 말한다. 외부적인 억압은 물론이며 심지어 자신이 억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억압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를테면 성공에 대한 열망, 절제되지 않은 성욕과 기쁨의 열병 또한 억압이다. 이러한 억압은 대체로 유용한 것들에서 비롯된다. 아니, 보다 과감히 말하자면 모든 유용한 것은 필연적으로 억압으로 작용한다.


크눌프는 유용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다. 유용하지 않기에 억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크눌프는 억압하지 않기에 거대한 우상에서 오는 환희와 격정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크눌프는 억압하지 않기에 소박한 기쁨의 순간순간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모든 억압에 기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행동하게 되는가? 모든 억압의 소멸은 모든 미추[美醜], 효용, 가치의 소멸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억압이라는 개입 없이 행동하게 만드는가? 그 모든 억압-지향이 사라진 상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일어설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크눌프의 대답은 우리 내면을 향한다.


(전략) 의지라는 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저절로 진행된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이 몹시 상심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생기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사악해지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해도 한 가지 죄는 여전히 존재하게 될 걸세.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느낄 테니까. 그리고 선한 일을 하면 만족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도 없을 테니, 그렇게 되면 선한 일이 바로 옳은 일이 될 수밖에 없고 말야. (72)
생각과 행동이 정말로 진실하다면 누구든지 거룩한 거야. 어떤 일이 옳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해. (중략) 난 그 동안 많은 사람들과 얘길 나눠봤고, 또 여러 가지 연설도 들어봤어. 신부, 교사, 시장,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지. 하지만 그 중의 어느 누구도 가슴 속 깊이 진실한 사람은 없었고,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리라 믿어진 사람도 없었지. 하지만 구세군은 여러 가지 음악을 연주하며 소란을 벌이지만, 난 벌써 거기서 서너 번이나 진실한 사람들을 만나봤고 이야기도 들어봤다고. (81, 밑줄은 인용자가 침.)


존 레논의 명곡, Imagine의 가사들이 떠오른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Nothing to kill or die for..." 우리 위에 천국도 없고, 우리 아래에 지옥도 없다. 우리 위에 있는 것은 오직 그냥 하늘일 뿐이다. 죽여야 할 것도, 무언가를 위해 죽어야 할 것도 없이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의 문제가 남는다. 타자의 엄존[엄연하게 존재함]성이다. 우리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지만 타자는 억압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속세를 떠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고독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크눌프 또한 과거의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 프란치스카에게 배신당한 과거 때문에 사람을 믿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 때문에 자유와 아름다움을 만끽하였지만 동시에 고독감을 지고 살기도 했다. 타자 속의 삶은 우리를 억압할 가능성을 가지지만, 타자를 떠난 삶은 고독하다. 이 딜레마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크눌프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앞서 우리는 영혼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크눌프는 휘파람, 시, 노래, 춤 외에도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소박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크눌프의 친구들은 그러한 재능을 보며 크눌프가 그 재능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였다고, 그래서 크눌프에게는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크눌프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 자신이 그러한 재능을 발휘하며 혼자서만 즐거웠던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크눌프의 아름다운 노래는 어느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노래는 아무런 해를 끼침이 없이, 어떤 죄책감을 느낌도 없이, 이 세상에 와서 존재하다 사라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순간순간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의 재능은 유용하지 않았으며, 설사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는 그 재능을 유용함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과 그 자신에게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순간순간을 크눌프는 살아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크눌프』의 마지막 단편인 「종말」은 크눌프가 나이가 들고 종말(죽음)을 맞기 전의 이야기를 다룬다. 죽음에 가까워진 크눌프는 하느님[1]과 이야기를 나눈다. 크눌프는 자신이 성에 눈을 뜨고 프란치스카로부터 배신을 당하기 이전의 충만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유년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치리라고 이야기한다. 크눌프는 하나님에게 차라리 그 완전한 세게에서, 혹은 즐거움을 느끼며 방랑했던 젊은 시절에 자신의 삶을 마감해주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이야기한다.


그러나 크눌프는 이내 하느님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조금도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참 뜻'이 무엇이었는지 하느님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앞선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크눌프는 우리의 영혼을 꽃에 비유하였다. 그에 따르면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몫을 철저히 혼자서 지고 가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도 그것을 알 수 있는데, 하루, 한 달, 또는 일 년 동안 사람들이 통곡하며 애도하겠지만, 그러고 나면 죽은 자는 영원히 죽은 것이다. 그처럼 우리의 존재는 가볍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존재는 아름답다. 불꽃놀이의 기쁨이 동시에 우리에게 두려움을 유발하였다면, 꽃과 같이 연약한 우리 존재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기쁨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꽃 같은 우리네 존재는 그리하여 아름답다. 아름다웠던 그의 유년 시절은 그처럼 연약하게 부서졌기에 동시에 아름답다.


헤르만 헤세가 어느 독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전지전능한 자세로 삶과 인간성에 대한 규범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를 사로잡는 것을 묘사할 따름입니다. 크눌프 같은 인물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롭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용한 인물들보다는 훨씬 덜 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잡는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 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1]
여기서 크눌프가 하느님을 통해 구원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소설에 따르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이다. 존 레논의 Imagine을 다시금 인용하자면, 하늘은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 그저 하늘일 뿐이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크눌프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장치로서 등장한 것으로 사료된다.


독자가 볼 때 어려운 어휘가 쓰이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신중히 읽었음에도 글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대부분 필자의 잘못인 경우가 많으며 그것은 저에게도 해당되리라는 점을 시인합니다. 그것은 아마 아직 저의 글쓰기 역량이 자기표현의 욕망을 실현하기에도 벅찬 까닭이리라 생각됩니다. 역량의 부족이 독자의 입장을 성심껏 고려할 여유의 부족으로 이어졌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글을 쓰며 느꼈던 저의 기쁨과 진심만은 전해지리라고 생각하기에, 부끄러운 글을 용기 내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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