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L POSTINO Nov 04. 2020

‘죽음 속의 삶’의 재현,
생동하는 감정들 (5.18)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우리가 어느 날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는 우리에게 죽은 사람 이상의 고통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녀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그녀의 몸은 사는 일에 몰두해 있음에 반해 다른 것을 너무 순간적으로 어찌해볼 겨를도 없이 미완성 속에 고정돼버린 채, 죽음 이상의 어두운 광기의 방 속에 갇혀져버렸을 것이기 때문에. (328)



여담인데, 문학과지성사의 표지가 내 취향에 잘 맞는 것 같다.


 


1. 타인의 죽음과 재현의 문제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소 막연해 보이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좀 더 구체화해보자. 죽음을 필연적인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개인들인,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보편성)과,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불확실성),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비가역성)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필연성)을 알고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무시무시한 사실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죽음을 망각하고 산다. 사실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삶은 곧 '죽음 속의 삶'이 될 것이다. 삶이 될 수 없는 삶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개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망각이다.[1]


그렇다면 이제 '나'를 넘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죽음을 필사적으로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인의 죽음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이 경우 우리가 흔히 취하는 태도 역시 망각이다. 그런데 타인의 죽음에 대해 망각하는 일은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망각하는 일에서 발생하지 않는, 새로운 문제를 불러온다. 타인의 죽음은 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확대된다. 그것에 대한 모종의 망각과 무지는 공동체 윤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 "몰랐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와 관련한 모든 도덕적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만은 없다.[2] 이는, 특히 공동체 차원의 거대한 죽음으로 그 문제가 확대될 때 더욱 문제시된다.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그리고 1980년 5월의 광주가 그러하다.


김형중의 말처럼, 이러한 사건들은 "상징적 질서를 훌쩍 초과할 만큼 거대한 트라우마여서(아우슈비츠나 5·18처럼) 그에 합당한 언어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지만, 이러한 "'재현 불가능한 것'의 범주에 넣고 마는 사건조차 '말로써' 재현(하려고 시도)해야 하는 것이 문학의 아이러니이자 운명이다."[3] 작가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이에 대한 유의미한 시도를 보여준다.


소설은 '재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장르이다. 재현을 둘러싼 여러가지의 문제들─이를테면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재현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가능성은 무엇인가[4]등─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다. 그렇다면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



2. 무엇을 재현하는가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재현될 수 없는 '그 날', 그 때 거기를 재현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날' 이후 "다시 그날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린 소녀와, 그 주위를 멤도는 '장'(남자)과 '우리'의 모습을 그린다. 


그래, 그 순간 내가 뭣을 했는지 가르쳐주지. 자 잘 봐. 내가 세세하게 말해주지. 너는 눈을 똑바로 뜨고 엄마 복부의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액체를 바라보았어. ... 소리로 되어 나오지 않는 고통 때문에 너를 더욱 움켜쥐고 있는 ... 엄마 손아귀에서 손을 빼려고 너는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지. ... 그래, 잔인하게 엄마 손가락의 갈쿠리를 하나씩 떼어내려 했어. ... 너는 급기야 한 발로 엄마의 내팽개쳐진 팔을 힘껏 누르고 네 손을 빼어냈어. 엄마의 근육살이 발밑에서 미끈거렸지. 너는 사력을 다해 밟았어. 그러고는 무더기로 이동하는 무리를 피해 달아났지. 몇 얼굴을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몇 얼굴이나 네 다급한 발길로 차버렸는지도 모르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으로 뛰어들어갔어. (324-325)


소녀는 '그 날', 살기 위해 총에 맞아 "구멍 뚫린 엄마"를 뒤로 한채, "몇 얼굴을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몇 얼굴이나" "다급한 발길로 차버렸는지도 모르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간다. 이 참혹한 사건 앞에 선 소녀는, 결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의미화될 수 없는 '그 날'-심연-죽음-공백 앞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녀의 사고는 그 거대한 의미의 부재 속에서, '그 날'을 향해 무한히 수렴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장'과 그녀를 추적하는 '우리들' 역시 '그 날'의 인력에 끌려들어간다.



3. 어떻게 재현되는가 (1)

    : 생동하는 감정 – 공포(두려움), 죄책감과 수치심


이 소설에서 인물들을 추동하는 핵심적인 기제는 감정이다. 소녀를 포함한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 감정들을 그저 일련의 감정군으로 묶어서 해석하거나, 병렬적인 것, 동시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들 각각이 가진 특성을 면밀히 살피고, 또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함이 마땅하다.


공포(두려움)


소녀를 보는 인물들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감정은 '공포(혹은 두려움)'이다. 소설의 초반에 숲 속에서 소녀를 본 '장'은 그녀를 보고 공포를 느끼고, 그녀를 공격한다.


(소녀는) 그를 섬뜩하게 하는 웃음을 흘렸다. 예쁘다거나 추하다거나 하는 느낌조차를 무화시키는 다른 어떤 것이 무어라고 말로는 되어 나오지 않지만, 이 작은 몸뚱어리가 머물러 있는 세상은 남자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리라는 결정적인 느낌이 그의 본능적인 방어적 근육들을 수축시켰다. (중략) 남자는 그가 느낀 이런 불편한 감정을 육체적 공포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는 모든 느낌을 육체적인 반응으로 번역해내는 사람이었고 모든 종류의 육체적인 공포를 공격으로 해소하는 데 습관화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245, 괄호는 인용자가 침)


다른 사람들도, 소녀를 보자 공포를 느끼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람들은 내가 웃는다고 다시 때리고 윽박질렀어. 나는 죽을힘을 다해 입을 다물었지.

갑자기 내가 입을 벌리면 악취 나는 오물이나 흑록색의 벌레들, 번들거리는 가죽에 덮인 파충류가 기어 나올까 봐 무서웠던 거야. (295)


공포는 우리 신체가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이는 감정이다. 공포는 위협 자극을 느끼는 상황에, 우리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감정이다. 따라서 그 대응이 잘못된 대응일지라도, 우리의 신체는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셰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불쾌하고 외적인 원인이 있고, 불확실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를 느낀다. 이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통제할 수 없음'이다. 공포와 분노가 발생하는 상황은 굉장히 유사한데, 우리는 그 상황에서 통제감을 느낄 경우 분노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공포를 느낀다. '장'은 그녀를 두들겨 놓더라도 그녀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할 수 없음을, 어떠한 통제감도 행사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다시 공포를 느낀다. '장'은 "그녀의 침묵" 앞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설령 녹초가 되게 두들겨놓아도 다시금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누웠던 풀잎처럼 스스로 일어나 앉을 일이 무서워 호히려 그 자신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으르렁거렸다. 한동안 남자는 그녀를 건드리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러웠고 무서웠고 끔찍했다. (249)


죄책감과 수치심


가장 즉각적 반응인 공포로 가득 찼던 소녀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마음에는, 잠시 후 수치심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들어차게 된다. 수치심과 죄책감은 인물들이 '그 날'에서 자유롭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주요한 감정이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 대한 이전의 비평들도 이러한 죄책감과 수치심의 작동 원리에 대해 주목한 바 있다. 이수형[5]은 '부재(=부채)'에서 비롯되는 죄의식을 인간적인 조건으로 제시하며, 죄책감이 이 소설을 추동하는 핵심적인 감정임을 지적하였다. 강동호[6]는 "최윤의 증언이 야기하는 부채의식이 단순한 죄책감보다는 수치심과 공포에 가까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좀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347)"라고 말하며 수치심과 공포를 소설을 추동하는 핵심적인 감정임을 지적한다. 또한 "수치와 공포는 소녀의 존재가 지닌 예외성과 고유성, 즉 차이가 아니라 어떤 근본적인 같음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소녀의 몸이 입증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근거하고 있는 근본적인 비인간성으로서의 육체를 통해 확인되는, 회피할 수 없는 동일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수형과 강동호는, 죄책감과 수치심 사이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필자는 강동호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동호가 주장한 수치심과 공포의 보편화 전략은 죄책감과 수치심 사이의 관계를 더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 보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모두 도덕적 판단과 연관된 감정이다. 그러나 두 감정이 도덕성을 판단함에 있어 심문하는 대상은 다르다. 죄책감은 행동[doing]에 대한 평가에 기반하는 감정이다.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죄책감은 행동을 수정하거나 만회함으로서 해소될 수 있다. 죄책감은 무언가에 실패했거나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이를 바로잡고 앞으로 이러한 위반 행위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느끼는 부정적인 정서인 것이다. 그런데 수치심은 존재[being]에 대한 평가에 기반하는 감정이다. 자신이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준에 어긋나는 존재로 여겨질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 이 죄를 자신의 전반적이고 안정적인 결함에 맞추었을 때 느끼는 부정적인 정서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죄책감은 행동[doing]에 대한 부적절감이고, 수치심은 존재[being] 자체에 대한 부적절감이다. 따라서 수치심은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와 연관된다.


그런데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 인물들에게 발생하는 죄책감은 쉽게 해소되지 못한다. 소녀가 느끼는 죄책감은 거대하다. 소녀에게 '그 날' 그 곳은 "내 끔찍한 범죄의 자리"이다. "혼자 살아남으려고" "엄마의 손, 팔, 흰 눈자위를 내 발로 짓이겼"기 때문이다. '장'은 소녀를 저렇게 만든 것이 무엇일지 질문을 던지다가, "그 꼴을 만든 데 자신도 한몫 낀 것 같아 먼저 흠칫"한다. 또한 남자는 소녀의 얼굴에 "그가 언뜻 본 수많은 실성한 사람이 한꺼번에 겹쳐지더니 순산 쪼글쪼글 주름잡힌 얼굴로 변"하는 것을 보며, "이상한 신체적 현상"을 느끼고는 소녀에게 "얘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이 "그녀와 똑같이 되어, 그녀 속에 들어가서 어딘가에 망가진 장치가 있다면 그걸 고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지하다시피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소녀에게서 돌려받는 것은 "한참 동안이나 그의 등골이 오싹 진저리치게끔 했던 붉은 빛깔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웃음"일 뿐이다. 그의 죄책감은 해소될 수 없다. '우리들' 또한 끝끝내 '소녀'를 찾지 못한다.


이들의 죄책감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지점을 찾아 올라가면, 궁극적으로는'그 날'의 문제에 가닿게 된다. ('장'과 '우리들'의 죄책감은 소녀에게로 가닿게 되는데, 결국 소녀의 죄책감은 '그 날'에 가닿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날'은 의미화될 수조차 없는 거대한 부재이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비가역적 무無 앞에서, 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만회하고 해소할 수조차 없다. 이럴 경우 도덕적 판단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존재로 귀착시킨다. 행위에서 비롯된 부적절감(죄책감)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적절감(수치심)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끝없는 도덕적 추궁을, 정신은 견딜 수 없어 점점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4. 어떻게 재현되는가 (2)

       : 죽음 속의 삶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 장에서 필자는 타인에 의해 환기되는 죽음에 대응하는 우리의 흔한 방식이 ‘망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타인의 죽음은 어째서 인물들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쉽게 망각되지 않고 생생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가?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죽음이 애도되고 망각되는 보편적인 방식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7] 사실 죽음이 가진 역설적 측면은,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죽음 직전까지, 죽음은 분명 산 자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산 자가 죽은 자가 됨과 동시에 죽음의 문제는 사라진다. 그것이 문제였던 주체 자체가 사라져버린 까닭이다. 그것은 소녀의 어머니의 으깨진 얼굴이, “그러나 평화로웠”던 까닭이리라. 그리고 그 죽음을 바라보는 자들에 의해, 죽음은 추모라는 애도작업을 거치게 된다. 그 결과, 남은 자들은 그 죽음을 적어도 감당할 수 있게 되고, 어느정도는 (항상 죽음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망각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서, 이러한 보편적인 애도와 망각의 방식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소녀라는 존재가 ‘죽음 속에서 살아있는’ 까닭이다. 소녀의 정신은, 점점 죽음으로 무한히 수렴한다. 소녀는 점점 죽음의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소녀의 몸은 너무나도 버젓이 ‘살아’서, “잡초 같은 생명력”을 보인다.


그녀에게 있어 몸은 마음보다 훨씬 강인했을 것이다. 설령 그녀의 의식이 때로 알 수 없는 구렁텅이로 곤두박질해 들어가고 혼돈과 광기의 지하 지대를 치달을 때도 그녀의 육체는 그가 맡은 최소한의 기능을 철저히 완수했을 것이다. (중략) 육체만은 어느 구석엔가 사건의 냄새를 녹음해두고 있어서 어떤 이성적 추리보다도 정확한 방향 감각으로 여정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293-294)
기적이 있다면 그런식으로라도 살아남아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그녀의 생명 자체가 아니겠는가. (293)


죽음 속의 삶이라 함은, 결국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망각될 수 없는 죽음의 현전現前함이다. 소녀의 고통과 상처는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낸다. 고통과 상처는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는 하지만, 동시에 고통과 상처의 주체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격렬한 방식이기도 하다. 송장은 고통과 상처를 받을 수 없다. 그 격렬한 몸의 전언 앞에 선 이는, 그것을 결코 외면하거나 망각할 수 없다. 그로부터 오는 공포, 죄책감, 수치심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소녀 그 자신도, ‘장’도, ‘우리들’도, 그리고 독자들도.[8]


그녀를 그중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김 씨의 말을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어느 날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는 우리에게 죽은 사람 이상의 고통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녀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그녀의 몸은 사는 일에 몰두해 있음에 반해 다른 것을 너무 순간적으로 어찌해볼 겨를도 없이 미완성 속에 고정돼버린 채, 죽음 이상의 어두운 광기의 방 속에 갇혀져버렸을 것이기 때문에. 살기를 그친 산 사람을 만나는 일이 보는 이에게 얼마나 극심한 고문일까. (328)



5. 그 날, 그 곳’과 ‘지금, 여기’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재현을 통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소설은 상상과 현실의 문제이다. 소설 작품은 “소설 쓰고 있네”에서의 소설의 의미가 아닌, “소설 같은 이야기”에서의 소설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재현-상상을 통해 ‘지금 여기’-현실에 유의미한 지향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첫 장에서 타인의 죽음에 수반하는 도덕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숙고는, 죽음의 망각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망각 자체는 우리의 삶에 필수적이다. 망각이 없다면 우리는 ‘삶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보편적인 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망각 또한 보편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은 분명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죽음조차도 외면하게 만든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이러한 타인의 죽음이라는 문제와 우리 자신 사이의 거리를, ‘죽음 속의 삶’을 사는 소녀의 재현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쉽게 망각할 수 없으며, 생동하는 감정—공포, 죄책감,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 날, 그 곳’의 문제는 ‘지금, 여기’의 문제가 된다.
 


[1] 우리는 필사적으로 망각하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2] 혹자는 부채의식이 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던가.
[3] 김형중, 「총과 노래 – 최근 오월소설에 대한 단상들 2」, 『후르비네크의 혀』, 문학과 지성사, 2016, 53-67.

5·18이 쉽게 언어화, 의미화될 수 없는 거대한 사건임을 고려하여, 본 글은 5·18을 소설에서 묘사된 ‘그 날’이라는 표현을 빌려 지칭하고자 한다.
[4] 사실 '재현'은 항상 폭력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재현'은 무언가를 그려내기로 '선택'하는 것이며, (익히 말해지는 바와 같이) 선택은 늘 배제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무언가 배제되고 억압되고 소외될 수 있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며, 아니 감수해서라도 문학은 무언가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5] 이수형, 「신판 해설: 부재의 효과」,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1992, 328-343.
[6] 강동호, 「해설: 희망을 증언하는 언어들의 역사」,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2018(제3판), 347-349.
[7] 물론 모든 죽음이 충분히 애도되고 망각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8] 소녀도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죽음을 본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갇혀 있기에, 소녀야말로 가장 고통스럽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 죽음을 마주했을 것이다. 기차 차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로 인해 견딜 수 없어 하는 소녀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단행본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2018(제3판), 241-332


참고문헌

강동호, 「해설: 희망을 증언하는 언어들의 역사」,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2018(제3판), 333-356.

김형중, 「총과 노래 – 최근 오월소설에 대한 단상들 2」, 『후르비네크의 혀』, 문학과 지성사, 2016, 53-67.

이수형, 「신판 해설: 부재의 효과」,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1992, 328-343.

매거진의 이전글 환생, 과거의 수선을 통한 되삶의 태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