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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독립군에서 전투경찰까지, 신념을 지킨 무장 투쟁가





1950년 12월 28일, 새벽 5시. 칠흑 같은 어둠과 매서운 눈바람 속에서 차일혁 대대장이 지휘하는 전투경찰대원들은 완주군 구이면 깊숙한 산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습니다.

차일혁 대대장의 얼굴은 추위에 시커멓게 그을렸고,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는 가운데서도 그의 눈빛만은 칼날처럼 차갑게 빛났습니다.

"조용히 전진하라! 적의 숨결까지 들릴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바람을 가르며 대원들의 귓전에 박혔습니다.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은 채로 권총을 쥔 그의 오른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길목에서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오직 앞산 능선에 숨은 적의 그림자만을 노려보았습니다.

대원들은 짚신과 농구화로 쌓인 눈을 헤집으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발목까지 파묻히는 눈 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찢어지는 소리가 뼛속까지 전해졌습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했고, 군복은 얇아 허리춤으로 스며드는 바람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결의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시커멓게 얼어 문드러진 채로 소총을 움켜쥔 채, 눈앞의 어둠을 뚫고 적의 기척을 찾았습니다. 허공에 흩날리는 숨결만이 그들의 긴장을 배반했습니다.




선두에 선 척후소대가 교동 다릿골 개울을 건너고, 이어 1중대가 조심스레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차일혁 대대장이 사이드 워카를 타고 건너려던 순간, 산 너머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탕! 탕! 탕!" 숨죽이며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사방에서 불을 뿜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되지 않는 적들의 총격에 대원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막 전투에 투입된 지 일주일 남짓, 실전 경험이 없는 대원들은 겁에 질려 허공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마!" 차일혁의 굵직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대대장은 당황한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정확히 조준하고 대응 사격하라!" 적들은 능선 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빨치산들의 총성이 다시 울려 퍼졌고, 몇몇 대원들이 눈 위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차일혁과 간부들의 지휘 아래, 부대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날이 밝아오며 희미한 여명이 적들의 위치를 드러냈습니다. 차일혁은 피 묻은 손으로 망원경을 들어 7부 능선을 주시했습니다.

"박격포 준비! 방향 270, 거리 400. 발사!" 그의 명령과 함께 공중에서 터진 M2 60mm 박격포탄이 빨치산의 은신처를 뒤흔들었습니다. 박격포탄이 능선을 향해 날아갔고, 폭발과 함께 빨치산들의 진지가 무너졌습니다. 전투경찰들은 돌격하며 반격을 개시했고, 기세가 꺾인 빨치산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빨치산은 도주하기 시작했고, 눈밭에 핏자국이 길게 늘어졌습니다.




구이면 전투는 이렇게 전투경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빨치산 42명이 사살되고 5명이 생포되었으며, 전투경찰 측에서도 3명의 전우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해가 중천에 오를 때, 구이면 계곡은 침묵으로 돌아왔습니다. 차일혁은 전사한 3명의 대원 옆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의 얼어붙은 손에는 여전히 총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고작 일주일 훈련으로… 이게 전부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보다 슬픔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눈 덮인 산은 이미 그의 첫 승리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피로 얼룩진 눈밭 위로, 전투경찰대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습니다.




1953년 9월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지구 반야봉 동쪽 5km 빗점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했습니다.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친인척들도 시신 인도를 거부했고,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 준 건 차일혁이었습니다.




차일혁은 철모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진 뼛가루가 철회색 금속 바닥에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떨렸습니다. M1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을 때마다 금속과 뼈가 맞부딪치는 단단한 울림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땅에 닿은 무릎은 아직도 무주 설천면 고지에서 쏟아진 기관총탄의 잔향으로 저릿했습니다. 그날 산등성이를 뒤덮은 붉은 안개, 비명 대신 공중에 멈춰버린 병사들의 입술... 68개의 그림자가 지금 이 철모 속에서 웅성거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일전에 차일혁은 이현상의 57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무주군 설천면으로 향했습니다. 공비들이 퇴각했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방심했던 토벌대는 고지에서 매복했던 빨치산의 공격으로 68명이 전사했습니다. 차일혁의 처음이자 유일한 패배였던 무주 전투였습니다)

"이현상."

부르는 목소리에는 적개심도 승리의 기쁨도 없었습니다. 오직 씁쓸함과 허망함뿐. 그는 천천히 철모를 기울였습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하얀 가루를 휘날렸습니다. 한때 수천의 부하를 이끌고 혁명을 외치던 사내는 그렇게 강물로 흘러갔습니다. 차일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콜트 M1911 권총을 꺼냈습니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지리산 자락을 울렸습니다. 마치 이 땅에서 사라져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듯했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그만들 쉬소."

동족상잔의 전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들, 이념 앞에 선 악연이었지만 결국 같은 땅에서 태어나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현상도, 자신도, 그들 모두. 차일혁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습니다.




아래는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중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이현상의 뼈를 내 철모에 넣고,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 물에 뿌렸다.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부치는 나의 조사였다. 지리산에서 숨져간 수많은 원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끝낸 이현상에게 보내는 조사였다.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기를 기원하는 나의 외침이기도 했다. 한 많은 그의 인생이 한 줌 재가 되어 섬진강을 흘러내렸다.




차일혁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입니다. 



차일혁 경무관



192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충청남도 홍성군의 외가에서 아버지 차유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제 원평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집안 사정으로 외가가 있던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이사하여 홍동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해 그곳에서 졸업했습니다. 이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홍성공업전수학교에 전학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6년, 평소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발언을 자주 하던 조선인 교사가 일본인 고등계 형사에 연행되면서 강압적인 대우를 받자, 이를 참지 못하고 일본인 고등계 형사를 폭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처벌을 피하기 위해 17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중국 망명 중 평생의 스승인 지강 김성수(1900~1969)를 만났습니다. 김성수는 의열단 출신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계열 독립운동가입니다.

김성수의 소개로 차일혁은 의열단장 김원봉, 임시정부 주석 김구, 중국 내 독립운동 최고의 사상가 윤세주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게 되고, 10대 어린 청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의 길을 걷게 됩니다.

중앙군관학교 황포 분교 정치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팔로군과 함께 중국 화북지방에서 항일 유격전 활동을 벌였습니다. 조선의용대는 약산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 주도로 1938년 중국 후베이성에서 결성된 독립군입니다.




차일혁은 조선의용대에서 요인 저격과 건물 습격, 유격전 경험을 쌓게됩니다. 그가 구사한 유격전의 핵심은 민심을 얻지 않고서는 유격 작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심 획득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주민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않는 엄격한 규율을 만들었습니다.




중국 유격전에서 익힌 또 하나, 바로 포병술, 즉 박격포 운영이었습니다. 스승이었던 김무정에게 곡사포인 박격포를 직사포로 사용하는 방법 등을 배웁니다. 김무정은 중화 인민군 포병장교, 팔로군 포병 사령관 출신으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역임한 공산주의 항일운동가입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했습니다. 6.25 때 인민군 2군단장을 맡았습니다.




차일혁은 귀국 후 스승 김성수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을 펼칩니다. 

1945년 11월 2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원남동 124번지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 총을 맞고 쓰러진 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사상범들을 혹독하게 고문해 악명을 떨치던 일본인 고등계 형사 사이가 시치로(齋賀七郞)였습니다.

1945년 11월 5일 자 경성일보는 '사이가는 오른쪽 가슴을 손으로 누르는 동작을 취했는데, 계속해서 제2탄이 머리를 관통하자 퍽 거꾸러지는 동시에 단말마의 소리를 지르면서 숨이 끊어졌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사이가는 차일혁과 김성수의 손에 숨이 끊어졌습니다. 사이가 시치로를 비롯한 고등계 일제 형사들을 처단한 차일혁은 수배받게 되고 전주로 귀향했습니다. 




그 시기에 6.25가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7사단 대위로 군에 입대, 전주와 전북에서 장병들을 모았습니다. 북한군에 점령당한 전라북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37명의 휘하와 함께 임실에 은거지를 둔 옹골연 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만, 유격대 활동 중 왼팔에 총상을 입고 전역하게 됩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했던 전북지구 전투사령관인 13연대장 최석용 대령의 추천으로 경감으로 임명됩니다. 독립군에서 군인, 대한민국 경찰로서 차일혁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1951년, 정읍 칠보발전소(당시 남한 전체의 전기를 책임지던 유일한 발전소)를 포위한 빨치산, 남한의 2개뿐이던 발전소 중 하나(영월 수력발전소)는 1.4후퇴때 이미 북한군에 빼앗겨 칠보발전소 하나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남한 유일한 전력 생산발전소였던 칠보발전소, 인근 빨치산 병력은 약 2,500명이었고 차일혁에게 주어진 병력은 겨우 75명이었습니다. 그들을 이끌고 차일혁은 칠보로 향합니다.

차일혁은 어둠을 이용해 4대의 트럭으로 차가 들어갈 땐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올 땐 헤드라이트를 끄고 하는 식으로 반복해서 오가는 방법으로 병력을 과장하는 묘책을 씁니다.

박격포를 쏘며 진격해 300명의 아군 구출, 주민 3백여명을 동원 병력을 과장하게 해서 적이 지레 겁을 먹고 후퇴시킵니다. 75대 2,500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작전이었지만,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룹니다.

전투 이후 지역민들의 민생안정을 위한 활동을 하고, 빨치산 토벌 중 노획한 소를 찾아가라는 신문 공고를 내기도 합니다. 포상금 30만원을 이재민 구호금으로 내놨습니다. 




차일혁의 토벌대는 인민군 중좌 최태환과 1.칠보발전소를 파괴하지 않을 것 2. 단순 부역자는 선처할 것. 두가지를 합의합니다. 

차일혁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단순 부역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물심양면 도왔습니다. 무장력을 잃은 사람들을 절대 사살 못 하도록 부하들에게 교육했습니다. 포로로 잡은 사람들도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되도록 죽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상과 이념에 따라 남과 북이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던 차일혁의 노력이었습니다. 포로를 반드시 심문하여 전향의지가 있으면 풀어줬습니다. 빨치산의 시체까지 매장하도록 인도적 차원에서 조치했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1951년 5월, 상부에서 지리산 내의 사찰과 암자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는 녹음기 때(여름) 빨치산들이 은거할 만한 장소를 사전에 아예 없애 버리려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남 구례군의 고찰 화엄사 일대를 작전 지역으로 맡고 있던 제8보병사단 대대장 방득윤 중령은 천 년이 넘은 문화유산 화엄사를 불태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고, 전북 지역을 방어하던 차일혁이 화엄사 내 대웅전을 포함한 건물의 문짝만 뜯어 불태우자는 묘책을 내놓았습니다. (자기의 작전 지역도 아닌 화엄사를 지키기 위해) 차일혁은 이 명령을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하여 문짝만 뜯어내 소각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견에 방득윤 대대장도 찬성하여 화엄사는 사찰 내 주요 건물의 문짝만 떼어내 소각해서 불타 없어지는 횡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차일혁 경무관 어록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그 외 화엄사 인근의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에 대한 사찰이나 문화재도 폭격이나 소각을 피하는 쪽을 택했고, 결국 차일혁은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 처분 등의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화엄사 경내의 차일혁 경무관 추모비



1951년 8월 2일 차일혁 철주 부대장(연대급) 임명되었고, 철주 부대를 이끌고 담양, 부안 등지에서 작전을 행했습니다.




차일혁은 1953년 9월 포로로 잡은 빨치산을 통해 이현상의 소재지를 포착했습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이끄는 57사단은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넘나드는 신출귀몰한 부대였습니다.

1953년 9월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지구 반야봉 동쪽 5km 빗점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했습니다.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친인척들도 시신 인도를 거부했고,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 준 건 차일혁이었습니다. 이 전공으로 인해 차일혁의 부대에 태극무공훈장이 세 개나 주어졌으나 정작 부대장인 차일혁은 태극무공훈장보다 낮은 금성 화랑무공훈장만 받았습니다.




1953년 12월 10일부터 1954년 5월 17일까지 제11대 임실경찰서장을 겸직했고, 그 사이 1954년 4월 6일 서남 지구 전투경찰대 사령부 수사 사찰과장에 보임되었습니다. 이어 1954년 9월 9일부터 1956년 2월 20일까지 제10대 충주경찰서장을 지냈습니다. 이때 충주군에 직업소년학교를 세워 지역의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고, 여러 가지 지역 밀착적인 정책으로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차일혁은 일제강점기 그가 복무했던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같이 활동한 부대였고, 빨치산 토벌 시 온정적인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을 빌미로 좌익 용공 분자로 몰려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이현상 사살 등 부인할 수 없는 공적을 감안하여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차일혁은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떠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1958년 8월 9일 오후 1시에, 가족들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오후 3시경 수영하던 도중에 심장마비로 익사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습니다.




38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차일혁이 남긴 역사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독립운동가에서 군인으로, 전투경찰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고, 목숨이 오가는 전란 중에서도 사람들을  돌보고 문화재를 지켜냈습니다.

사람을 아끼고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차일혁 경무관의 치열했던 삶이었습니다.




아래 글귀는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 차일혁 경무관이 남긴 말입니다.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들은 왜 죽었는지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나중에 차일혁 경무관은 공적을 인정받아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추서되고 2008년 문화훈장도 추서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무공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6개) 경찰관이기도 합니다. 1991년 MBC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장하림(박상원 분)의 실제 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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