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어야겠다고 문득 생각할 때가 있는데 해가 바뀌고는 더 생각이 잦아졌다. 시를 읽을 때인가 보다. 새해 새달 첫 시집에 의미를 두고 백석의 시집을 꺼낸다. 백석의 시 몇 편을 알고 있으나 전편을 보지 못해 늘 숙제처럼 마음 한켠에 있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찌릿함이 그대로다.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나린다니...사랑이 푹푹 쏟아지는 이 느낌을 백석이 아니고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바다」 전문
키가 훌쩍 크고 잘 생긴 백석이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다 쇠리쇠리한 햇볕에 쓸쓸해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눈에 쉽게 다가오는 「바다」 같은 시는 쉬워도 여전히 좋다. 하지만 좋은 건 그냥 얻어지지 않는 법. 대개는 평안도 정주 방언을 찾아가며 봐야 해서 쉽지는 않은데 예전 백석이 사랑한 고향의 말을 따라가며 시인의 마음을 읽는 그 재미도 좋다.
나는 백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시를 보면 백석을 잘 알 것만 같아서 그의 시를 읽는 시간이 좋다. 북방을 떠돌며 백석이 만난 낮고 못난 사람들, 통영, 고성, 삼천포를 다녀간 소회,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귤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 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는 첫사랑의 고백, 정갈한 갈매나무에 대한 그리움...시를 사이에 두고 백석이라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알아가는 시간은 여느 여행못지 않게 온몸의 감각을 열고 낯선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세계는 내 기대를 비웃듯 맑고 아름다워 한동안 두근대며 바라볼 뿐이다. 그곳에는 흰 당나귀가 평화롭게 섰고,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와 논으로 나서는 어린 백석이 있고, 김이 펄펄 나는 가마솥에 국수를 삶아 시끌벅적한 친지들이 있고, 마른 잎새 쌀랑쌀랑 소리 나며 눈을 맞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