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수업을 할 때 처음 두 시간은 무작정 시를 읽힌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시를 2, 30편 골라 2단으로 편집하고 양면으로 인쇄해서 시를 준다. 인터넷 검색으로 복붙하면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백지에 시가 한 구절 한 구절 새겨지는 순간이 좋아 왠만하면 직접 자판을 친다. 다 같이 소리내어 읽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읽고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도 읽고. 다 읽고 나서 제일 좋은 시를 하나씩 골라 좋은 이유를 말한다. 맨 끝에는, “이 중에서 쌤이 제일 좋아하는 시는 뭐게?” 묻는다. 물으면서 나도 속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를 고르는데 항상 둘 사이에서 주춤한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와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사이. 둘 사이에서 멈칫거리다 항상 마지막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한테로 간다.
월북시인이라 나는 학교에서 이름을 들어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백석 시인을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시들 중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았을지 모른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가 한숨에 훅 들어와 숨이 막혔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고흐의 그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듯 백석의 시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일 당장 떠날 수학여행 짐을 꾸리면서 김연수의 소설집 <일곱 해의 마지막>을 마지막으로 챙겨넣었다. 학년부장의 세심한 배려로 교사들은 1인 1실을 쓰게 되었다. 12시간이 넘는 인솔 노동을 끝내고 밤 11시 협의회 이후 뽀송한 침구에 널부러져 책을 펴들고는 백석의 분신인 기행의 이야기를 듣다 잠에 빠져들었다.
책은 1957년부터 1963년까지 북한에서 백석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상허 이태준이 백석을 찾아와 국숫집에서 술 한잔을 꺼내지만 선뜻 받아주지 못한다. 이태준은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공허하게 대동강변을 돌아다닌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월북한 모더니스트들은 자아비판을 강요당하며 사회주의형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내다버리거나 버릴 것을 강요당한다. 사람들은 기행을 소련문학 번역가로 알 뿐이다. 나는 책에서 일곱 해 동안 시를 쓰지 않는 혹은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기행의 뒤를 따르며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백석을 그려본다. 백석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회와 문학을 꿈꾸었을 이태준과 박태원은 또 어떤 고뇌를 하였을지 어떤 순간에 기뻐하였을지 어떻게 늙어갔을지 혹시 더 아름다운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지 상상해본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에 잉크가 얼어붙어 글을 쓸 수 없다는 삼수에서 그를 알아본 서희가 있어 조금은 덜 외롭고 쓸쓸했기를.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그녀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며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 곳에서,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