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더러운 오물을 가득 담은 듯이 찝찝하다. 그냥 싫어하는 사람과 몇 마디 대화를 했을 뿐이다. '이 사람이 싫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두드려 빨아서 강렬한 햇빛에 살균 소독하고 싶은 기분이다. 왜 나는 나의 소중한 시간을 이 사람을 싫어하는데 쓰고 있는 걸까? 그냥 각자의 삶을 살면 될 일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사람이 싫어지면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합리화로 가득 찬다. '나라면 이렇게 말하진 않았을 거야.', '나라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그 사람을 옹호하는 마음도 같이 든다. '그냥 몸이 아파서 예민했던 걸 거야.', '그냥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일 뿐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러다가도 다시 내 눈앞에 그 사람을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더러운 쓰레기를 손에 가득 쥔 채로 쓰레기장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이 되어버린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게 된다. 마음은 전염된다. 내가 싫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도 날 싫어하게 된다. 아무리 꼭꼭 감추려고 해도 삐져나오는 것 같은 냄새 같은 구석이 있다. 싫어하는 마음은…. 귀와 눈은 막아도 코는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냥 어쩔 수 없다. 그냥 한 동안은 그냥 그런대로 나를 두어야 한다. 억지로 싫어하는 마음을 가둬둘 수 없다.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싫어하는 마음은 너줄너줄 퍼져나간다. 아무리 꼭꼭 닫아두어도 여름이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 같다.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더 싫어질 때가 있다. 그건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상대로 그런 마음이 들 때다. 그럴 때마다 내가 참 작은 사람이구나 느껴져서 더 싫어진다. 싫어하는 마음을 멈춰보려고 할수록 더 그 마음은 세차게 꿈틀댄다. '당연히 미숙할 수 있어.', '아직 어려서 상대방을 헤아리지 못할 수 있어.' 수 없는 합리화를 해도 결국 싫어지는 마음은 세차게 꿈틀댄다. 차라리 마주하지 말자. 피하고 또 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미숙함과도 맞서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자주 드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감정을 나누면 그저 아무 감정 없는 사람이 90%이고, 좋아하는 사람 9%, 싫어하는 사람 1% 정도인 것 같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태어나서 싫은 사람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것 같다. 다섯 명 이내였다. 감정까지 써가며 대면할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좋으면 함께하고 싫으면 피할 수 있었으니까 싫어하는 마음이 도달하기 전에 관계를 끊었던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에 감정이 개입되면 마음이 다치는 일이 많으니까 거기까지 가고 싶지도 않았다. 금방 잊고 단순한 성격이라 순간순간 발생하는 껄끄러운 일들은 금방 잊고 헤헤 웃곤 했다.
나이가 들면 그런 감정들에서 더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싫고 좋은 감정들을 이겨내는 이성적인 마음의 힘이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은 아닌가 보다. 마흔을 눈앞에 둘 때까지 이런 일로 괴로워하는 일이 생길 줄 몰랐다. 어디든 이런 나의 옹졸함을 이 감정의 오물을 배출할 수 있는 구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냥 쉽게 떠들고 쉽게 이야기할 수도 없다. 꽉 막혀버린 하수구에 갇힌 기분이 든다. 차 오르는 더러운 기분을 아무리 퍼내려 해도 넘쳐 흐른다.
어렵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그런 마음을 멈추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해야 하는 것도, 모두 다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