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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공격 속 진심을 읽어내고, 반격하는 법

나르시시스트의 궤변을 해체해서 공격성에 찬물을 끼얹자

초반에 나르시시스트는 좋은 사람인 것처럼 연기를 한다. 

그때 우리는 말랑한 친절 속에 억지로 구겨 넣은 음침함을 감지할 수 있을까.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에게 공격적이다.

그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 늘 혈안이 되어있다. 

하지만 처음에 나르시시스트는 깍듯한 매너와 과도한 친절로 본심을 감춘다. 

겉모습만 얼핏 보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타적이고, 자애롭다. 

물론 그가 제멋대로 행동하기 전까지만.   


B는 출판사 대표이사다.   

최근에 그는 커다란 불만이 생겼다. 

얼마 전 자신이 뽑은 신입사원이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거다. 

직원은 B와 1:1로 면접을 봤다. 

면접시 특이사항은 별로 없었다. 

아, 1시간 내내 B가 혼자서 회사의 규칙을 말한 것 빼고는. 

면접은 면접자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질문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합격하다니. 

사실 사원은 기분이 얼떨떨하다 못해 꺼림칙하기까지 했다. 

자기소개서를 내기는 했다. 

그래도 대면으로 물어볼 게 더 있었을 텐데.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합격 이메일을 덜컥 보냈을까. 

처음에는 경력만 보고, 뽑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얼마 뒤, B는 사원이 윤문한 글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왜 '자기 자신'을 '자신'이라고 했어?"


자신과 자기 자신이 뭐가 다른가?

자기 자신이라고 써도 되고, 자신이라고 써도 무방하다.

의미 없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는 냅다 짜증을 냈다.


"'개인은 국가의 미래이다'라고 쓰지 말고, '개인은 국가의 미래다' 라고 써야지. 누가 이렇게 써? (아무도 그렇게 안 쓰고, 너만 그렇게 쓰는 거야)"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런데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의문이다. 


70만부 이상 팔리고, 개정판까지 나올 정도로 흥행한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책에는 대다수의 문장이 'OO이다' 라고 나와 있었다.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어서 인상깊었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도 아니었다. 

B가 이 책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는 상대가 남들이 안 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이를 상실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과했다. 

실정을 보니, 보편적으로 쓰는 문장구조였다. 

베스트셀러에도 수두룩하게 나온 문장 구조인데 말이다.



나르시시트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난데없이 급발진을 한다. 

딱히 문제 삼을 만한 일도 아닌 것들을 두고, 과도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그가 일으키는 갈등은 불필요하고, 영양가가 없많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특정인 타깃삼아 괴롭히는 걸 삶의 루틴으로 삼고 있다. 

그는 생존 에너지가 부족하다. 

자아가 없고, 자존감이 낮다. 

그래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면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살리려고 다른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충당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상대와 의도적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서열을 가르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다. 

B에게 신입사원은 희생양 역할을 하기에 딱 적합한 인물이었다.  

나르시시스트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싸움거리를 만든 뒤 상대가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관찰한다. 

그 다음 상대가 자신의 말을 받아주는 것 같다면 좀 더 자극적인 공격을 가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상대를 공격할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너무 지엽적이고 자잘한 것들까지 신경을 쓴다.

스스로 우스워지는 길인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같다.

증오를 끝없이 토해내는 지옥의 개와 비슷하다.


맛있는 먹이를 준 인간에게 쉴 새 없이 으르렁대는 짐승을 상상하자.

나르시시스트의 습성이 그러하다.     


누군가가 호의를 표현하면 그의 마음에서 벰의 똬리 같은 경멸이 우거진 숲처럼 빠르게 자라난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금기시되는 것 중 하나가 환하고 따뜻한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다.


그는 긍정적인 감정을 경계하고, 혐오한다.

자기 앞에서 환하게 웃는 자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야 하는데 상대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유롭다.

그 점이 나르시시스트를 분노하게 한다.

우리는 해맑게 그의 발작 버튼을 누른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대해 준 것밖에 없는데 상대가 자꾸 짜증을 낸다.

그렇다면 한 번쯤 그의 실체를 의심해 봐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에 민감하다.

이런 심리의 밑바닥에는 나르시시스트의 본성이 깔려있다.  


그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망설임 없이 굴복한다.  

서열의 윗단계에 머무는 자에게 폴더폰처럼 숙이면서 서열이 낮거나 '약해 보이는 사람'을 정성 들여 괴롭힌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나약한 모습이 노출되는 것을 결벽증적으로 싫어한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남도 자신의 약한 면을 보면 괴롭힐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희생양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누구보다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품고 있다.

그의 유해한 세계 속에서는 잘 웃고 따뜻한 사람을 약자 '같다고' 규정한다.

소위 말해서 '착해 보이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예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드러움은 본질적으로 강함에서 비롯된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주변을 돌아볼 줄 아니까 정중하고 따스한 거다.


오히려 약자는 나르시시스트다.

그는 쉽게 불안해하고, 상처 받는다.

독립적인 자아 정체성이 없기에 외부 환경과 타인의 태도에 크게 영향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분노는 상처에서 비롯된다.

화를 자주 낸다면 자존심에 자주 타격을 받는다는 뜻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회복탄력성이 없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니 그는 상처를 안 받고는 못 배긴다.  


무엇보다 약해 보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약하다는 간접적 고백 아닐까.

실제로 나르시시스트는 짜증이 많다. 그가 자극에 민감하다. 배타적인 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것도 경계심이 많다는 증거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유약한 내면은 실존한다.

다만 당사자가 진실을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최대한 실체를 감춰 보지만 무의식 중에 실체가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과잉행동을 시도한다.

폭언을 한다.

깎아내린다 .

조롱한다.

허세를 부린다.

그 외에 별별 방식으로 괴롭힌다.

자기 자신을 이미지를 신설하고, 유지하려고 말이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이유다.

  

나르시시스트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에 우리의 친절을 은연중에 거부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실체를 모르는 희생양은 어느 순간부터 혼란스러워진다.

매너 있던 그 사람이 요새 신경질만 부리네.  

내가 뭘 많이 잘못하는 건가?

방금 저 사람이 날 비꼰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아니다.

그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르시시스트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그는 차오른 분노를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남이 잘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가 실제로 못되게 군 게 맞다.

당신의 불길한 촉이 예리했다.

우리는 교묘한 공격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남의 자존심에 고의적으로 흠집을 낸다.

타인이 눈치를 보면서 괴로워하고, 비위를 맞춰주길 그는 아이처럼 기다린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이 비난에 함몰돼 죄의식을 갖길 바란다.

왜냐면 그가 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르시시스트의 병든 기대에 부응해주지 말라.

그는 지적하고 무안 주는 걸 훈장으로 여긴다.

부정적인 에너지로 다른 사람에게 타격을 주는 일을 전리품처럼 해석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도구로 볼 때 가능한 인식이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혼낸 아들이 겁에 질려 오줌을 쌌다고 자랑스럽게 떠벌거렸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아주길 바랐던 것이다.

비실 비실 웃으며 지껄이는 그의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비난하는 만큼 자신이 빛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자신감과 자부심이 결여돼 있다.

크고 작은 일에 분노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쉽게 상처받기에 대인관계를 힘들어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본인의 매력이 이런 행동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었다.

스스로 빈수레임을 방증할 뿐인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없고, 사리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는 사람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자신의 심리가 어디에서 생성되는지도 모른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을 나르시시스트도 명료하게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은 다 맞다고 우긴다.

어리숙하고 나약한 겁쟁이가 그의 실체다.

그러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부정적인 말에 고개를 끄덕일 필요 없다.  


나는 잘했는데 너는 잘못했어라는 게 나르시시스트가 늘 내리는 결론이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뒷받침할 명분을 찾으려고 그는 남에게 태클을 건다.


오래된 핸드폰 배터리처럼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은 느리게 충전되고 빠르게 방전된다.

사고가 건강한 사람은 매사에 삐지느라 바쁜 나르시시스트의 심리에 공감하기 힘들다.

날카롭고 고압적인 모습이 거북할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도덕적 역치가 낮다.

그래서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오히려 못되게 구는 걸 즐거워하기도 한다.


기독교인 나르시시스트는 기독교 교리에 따라 작은 선행을 하면 스스로 엄청나게 희생한 것처럼 생각한다.

타인의 배척하고 낮게 보는 게 기본적인 태도이기에 물론 주관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들이 많이 내려놓은 게 맞다.

웃기게도 도덕적 역치가 낮아서 자신을 더 착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거야.

너를 걱정해서 한 말인데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해.

(자부심 섞인 목소리로) 내가 원래 할 말은 하는 사람이잖아.


이는 나르시시스트의 상투적인 거짓말이다.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충고 비슷한 걸 하면서 거들먹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도 본인의 언행으로 다른 사람이 기분 나쁘다는 걸 안다.

알기 때문에 더욱 툴툴거린다.

그는 다른 사람이 찡그리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영향력을 시험해 볼 때, 가장 쉬운 방법이 다른 사람을 타박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낮다.

낮은 자존감을 대체하려고 가짜 자존감을 만드는데 특히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자존감 쌓아 올리기의 프로젝트다.

부정적인 감정을 남에게 전가해서 열등감을 일시적으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뱀이 배를 밀며 기어 오는 장면을 상상하자.

독을 가진 생물이 소리 없이 다가와 순식간에 이빨을 드러낸다면?

물리기 직전이나 물린 후에야 정체를 파악한다면?

때로 나르시시스트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은 척하면서 공격한다.

친절한 말투로 상대를 비하한다.

자존심 찌르는 막말을 하면서 걱정한다고 둘러댄다.

따뜻한 말에 가시 돋친 언어를 섞어 악의를 희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와 대화는 종종 불쾌하다.     

분명 하하 호호거리면서 평범하게 대화했다.

상투적인 마무리 인사까지 나쁜 요소가 없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가 지나가듯이 무심하게 던진 말이나 끝을 맺지 못한 문장들을 곱씹게 된다.

간단명료한 평가처럼 들렸는데 세세하게 따지니 나에 대한 불만과 비난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있어야 평가도 한다.

물론 그의 까칠한 조언 비슷한 걸 듣기 전까지 나에게 이토록 지대한 관심이 있었나 의아했었다.


기분이 어정쩡하게 좋다.

나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자존심에 상해를 가한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타적인 태도로 충고한 것 치고 태도가 오만했다.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나를 바라보던데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내가 아는 나와 상대가 아는 내가 너무 다르다.

그럼 혹시 내가 나를 과대평가했나.

아니면 상대가 나를 과소평가했나.


나르시시스트가 나를 비하한 걸 고급스럽게(?) 포장해서 전달한 것 같다.

차분한 어조에 출처가 불명확한 분노, 원인이 불분명한 멸시 따위가 섞여 있었다.

대부분의 희생양은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어퍼컷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너무 갑작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가 마냥 공격했다고 보기엔 태도가 천진난만했다.

악의를 품었다고 해석하기엔 그동안 서로 잘 지내왔다.

그리고 대화의 맥락에서 나르시시스트의 감정이 상할 만한 에피소드가 없었다.  


영화 <슈렉>의 고양이 표정을 지으면서 나르시시스트는 손가락 밑 바늘 같은 충고를 던졌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정색하기 애매했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상대의 선의(?)를 저버리는 분위기가 될 듯하다.  


나르시시스트의 속 보이는 연기를 간파한 누군가가 그의 정곡을 찌르면 어떨까.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어머,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 좋은 의도로 말한 건데.  

네가 오해했나 봐.

원래 내가 말할 때 시니컬한 편이거든.


이렇게 말이다.


그럼 무슨 의도였는데?

상황을 왜곡 없이 해석하면 나르시시스트가 뺑덕어멈처럼 심술을 부렸다.

그는 악의를 담은 게 아니라고만 하지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함구한다.

근거가 없는 부실한 주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아니면, 나르시시스트는 크게 분노한 뒤 갑자기 방긋 웃는다.

우리를 격하게 비난하고서 작은 칭찬을 덧붙여 화제를 돌린다.

방금 화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뉘앙스다.

나르시시스트의 지적은 알맹이가 없다.

그가 제기하는 불만 쪼가리가 무엇인지 들어 보자.


말이 너무 빨라.

말이 너무 느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적당한 속도로 말하기’는 없다.

그는 말이 빠르거나 느리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만 취사선택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사고방식은 단순하다.

사안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지엽적으로 판단한다.  

말이 빠르면 강한 것이고, 말이 느리면 약한 것이다.

물론 나르시시스트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유난히 말을 빠르다고 강조한다.

‘내가 원래 그래.’

그는 말이 빠른 것과 본인이 한 성격 한다는 것을 자부심 있게 고백했다.


사실 그 나르시시스트가 말의 속도와 성격을 강조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제 그가 팀의 스케줄을 배포했다.

그런데 일부가 잘못 표기돼 있었다.

이를 발견한 팀원이 틀린 부분을 되물었다.  

‘월요일로 돼 있는데 화요일이 맞는 거죠?


팀원은 자신이 주도하는 일정이라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비판의 의도와 감정이 없었다.

말 그대로 ‘확인’하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충격을 받았다.

팀원이 (감히) 나를 지적한다고 해석한 것이었다.

그는 단말마를 냈다.

‘뭐?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있다.

정말 틀렸다.  

그 일로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를 받았다.


이후 나르시시스트는 유독 그 팀원을 경계했다.

회의할 때 팀원의 의견에 깐족거리며 실실 웃어서 분위기를 흐려놓거나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사람 앞에서 본인이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제3자가 보면 스케줄 입력을 잘못한 게 그렇게까지 태도를 바꿀 일인지 싶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는 스케줄 입력을 실수했다고 지적 능력까지  의심받을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쉽게 상처받는다.

상처를 건설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상처에 매몰돼 빠르게 마음을 닫는다.

스케줄을 확인한다는 것은 통상적인 절차인데 그는 수치심마저 느꼈다.

나르시시스트가 비판에 민감하다는 증거다.


나르시시스트는 강자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지만 그는 약자의 마음으로 산다.

즉 사실 그는 사람을 몹시 두려워한다.  

정확히 말하면 상처받는 것에 겁을 낸다.


물론 인간은 상처받기 꺼려하고, 어느 정도 두려워하는 것도 맞다.

정상적인 사람의 심리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가 느끼는 두려움은 차원이 다르다.

그는 상처에 집착하고, 두고두고 보복을 꿈꾼다.

나르시시스트 인생의 수레바퀴는 상처로 굴러간다.

그만큼 그가 상처받는 것에 유난히 예민하다는 거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남을 괴롭힌다.

과잉 방어를 해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까 봐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매사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도 공격받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방금 그 나르시시스트처럼 말이다.


괴롭힘을 조언하는 행동으로 탈바꿈하려고 그는 갖가지 명분을 만든다.

사실이 아닌 걸 사실처럼 말하는 게 명분 만들기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는 거짓말쟁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선택한 방식은 졸렬하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남 탓을 한다.   


작은 일에 호들갑을 떨면서 비난한다.

훈계하면서 자기 자랑을 슬쩍 끼워 넣는다.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높여서 표현한다.


출판사 사장이 책을 만들 때 출판인이 사용하는 명칭을 설명한 적이 있다.

설명을 마친 후 그는 덧붙였다.

나는 교수가 아니야.


선생도 아니고 ‘교수’가 아니라고?

설마 대학교 교수를 말하는 건가.

당연히 교수가 아니다.

출판사 사장을 교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가 교수까지 될 역량은 못 된다.


그가 전달한 내용은 간단한 구글 검색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인터넷에 다 나와 있는 ‘명칭’을 언급했다고 ‘교수’까지 운운하다니.

인터넷에 나온 정보를 읊었을 뿐인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을 과장해서 표현하느라 상황에 부적합한 단어를 선택했다.


저는 기준이 높은 사람이에요.

어떤 나르시시스트가 팔짱을 낀 채 이렇게 말했다.

그의 표정은 늘 경직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소통을 거부한 채 조용히 일만 하다 가곤 했다.

그가 진짜 그랬던 이유가 있었다.


그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에게 무시받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는 건지 유난히 무시받는 걸 두려워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무시할 거라고 예단했다.

그 예측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아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기준이 높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한 말이었다.

기준이 높다고 판단한 기준은 무엇일까.


그의 커리어는 반쪽짜리 경력이었다.

출판사 사장인 그는 상처받을까 봐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 국내에서 작가를 발굴하지 않았다.

대신 외서를 번역한 걸 윤문 하는 정도의 일만 했다.

기준이 높다는 게 추상적인 말이지만 대략 완벽주의자라는 주장으로 해석하자.

적어도 그의 회사생활을 보면 기준이 높지 않았다.

완벽주의자도 아니었다.  


결국 그가 기준이 높다고 말한 이유는 무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했다.

신입사원이 자신의 커리어를 의심한다고 생각해서 과장스러운 제스처를 취했을 수도 있다.


구글에서 PDF 찾는 법을 아나요?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나에게 물었다.

아주 간단하고 보편적인 정보도 그는 자신만 아는 것처럼 질문했다.

사소한 것에 자꾸 아는지 모르는지 물어보는 것도 본인이 많이 안다고 주장하고 싶어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계발로 실력을 높일 생각을 못하고, 그저 다른 사람을 부족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말이 느려서 내가 불안해.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원래 말이 빠르고 목소리가 커.


내가 볼 때는 말하는 속도가 둘 다 ‘보통’이었다.

왜 굳이 나는 말이 빠른데 너는 말이 느리다고 이분법적으로 판단했을까.


그리고 남이 말하는 속도로 불안감을 느낀다는 게 살짝 비상식적이었다.

나르시시스트의 사고방식은 질서가 없고 보통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다.

그의 핵심은 자신과 타인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람들과 잘 지내면 그는 이렇게 비난한다.   

너는 사교성이 좋아.

그런데 네가 특정인들하고만 잘 지내면 아직 너랑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외감 느껴.


사람들과 못 지내도 역시 문제가 된다.


너는 왜 사람들하고 안 어울려?

너는 스스로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들하고 어울리면 친하지 않은 이들을 챙기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사람들하고 못 지내면 네가 특권의식이 있어서 선을 긋는 거라고 주장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중립이란 개념이 없다.  

그는 흑백논리로만 사람을 규정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나르시시스트가 신입사원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신입사원이 너무 자신감 없는 것 아니야?

신입사원을 적응 중이었을 뿐인데 자신감까지 운운한다.

하지만 신입사원이 빠르게 적응하려고 회의할 때 의견을 자주 내는 것도 싫어한다.

신입사원이 너무 자신감 있는 것 아니야?

이렇게 비난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중립이란 개념이 없다.

우리가 평이하게 행동해도 나르시시스트는 자신감이 없거나 혹은 있는 사람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조금만 말을 안 해도 자신감이 없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회의시간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타진하면 그것도 불만이다.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지적은 내용이 없을 때가 많다.

내용이 없다는 것은 말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B가 본격적으로 A를 비난하면서 이렇게 지껄였다.

그런데 네가 우기는 면이 있어.


물론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A가 이 얘기를 꺼내자 B는 반색하면서 말을 바꿨다.

아니야. 나는 네가 우긴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기는 건 내 스타일인데, 하하.

네가 오해한 걸 우긴다고 표현했을 거야.  

물론 뭘 오해했다는 건지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A는 황당했다.

‘너는 우기는 사람’이라고 자신감 있게 평가하더니 이제 와서 말을 바꿔?

심지어 B는 ‘네가 아니라 바로 내가 우기는 스타일’이라면서 당당하게 커밍아웃(?)까지 했다.


A는 우긴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며 당사자가 기억 못 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A의 강경한 태도에 B는 입장을 다시 바꿨다.

내가 너한테 우긴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무슨 말이지?

한 문장에 부정이 두 번 들어갔다.

부정을 부정하는 것은 긍정이다.

아까 우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또 말을 번복한 것인가?


A가 말을 자꾸 바꾼다고 지적하자 B는 궁색하게 답변했다.

너를 떠올렸을 때 우기는 이미지가 없다고.

특정 상황에서 우기는 것뿐이지, 너란 사람 자체가 우기는 성격은 아니야.


A가 뭘 우겼다는 걸까.

B의 말에 주어나 목적어가 없다.

특정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특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우긴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었다.


나르시시스트의 이상한 해명은 본인이 하려는 말이 뭔지도 모르고 막 달리는 것만 같다.

구체성이 미약하고 추상적이라 뜻을 해석하기 모호하다.

앞, 뒤가 안 맞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야기의 흐름과 무관한 주제를 꺼내 대화의 물꼬를 다른 데로 돌린다.


나르시시스트의 논리가 허술한 이유는 대체로 타인과 상황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그는 부정적인 감정에 스스로 매몰될 때가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받는 일에 민감하다.

대체로 그들이 분노를 수시로 드러내는 것은 수시로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기를 다루듯 부드럽게 대해줬다가 희생양 후보군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따뜻하고 배려심 가득한 모습을 보이면 나르시시스트가 양심 없이 우리를 이용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를 봐주지 마라.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면 서로 득이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게 되고, 나르시시스트는 죄를 지을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는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한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의존해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기에 그렇다.


물론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사람들의 지지에 힘입어 살아가고 싶은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심리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인정욕구는 지나치게 비대하다.  

그는 타인에게 거의 칭송에 가까운 존경심을 요구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조건 남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대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온갖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건다.


타인의 자존심을 공격해서 흠집 내기가 나르시시스트의 취미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과도한 충성심을 바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받는 것에 민감하다.

비판을 들은 나르시시스트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으면 더 힘든 일도 있고, 네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볍게 응수한다.

그런데 정작 고민자와 똑같은 일을 겪은 나르시시스트는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면박 주는 걸 좋아한다.

본인이 신경질 낸 상황을 본인이 가장 신경 쓰고 있다.

갑자기 미소 짓는 이유도 타인에게 내가 짜증을 냈다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선한데 네가 원인을 제공해서 따끔하게 한 마디 한 것뿐이야.

나는 절대 나쁜 의도를 가지고 너를 괴롭히려고 짜증 낸 게 아니야.

내가 기선제압을 하고 싶어서 유치하게 나온 건 아니라고.


사실 내가 성격이 좀 세.

네가 내 심기를 거스르면 아까처럼 나는 또 분노할지 몰라.

내 눈치를 보면서 비위 좀 맞춰보지 않을래?


나르시시스트는 대충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 웃는다.

인위적이고 계산적인 웃음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객관적인 평가를 한다고 자부한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듯이 말한다.

아직 너희는 사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부족해. (그러니까 ‘객관적인 판단력’을 지닌 나한테 물어봐)


나르시시스트는 정말 주관적인 판단력을 발휘한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을 부정적로만 평가한다.

그리고 본인만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음의 대화를 보고, 나르시시스트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보자.


A: 기분 나쁜 게 있어서 전화했어.

B: 그런 것 같았어. 나도 욱해서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싶어.


A의 직감이 맞았다.

얼마 전 A가 B에게 힘든 일을 토로했었다.

몇 번의 전화통화를 했고, 만나는 동안 B의 태도가 이상했다.

웃으면서 짜증을 내고, 한심하다는 뉘앙스로 상대를 비하했다.

간헐적으로 무시하다가 이젠 작정하고 악의를 팍팍 티 냈던 것이다.


초등학생이라고 상대를 비하하거나 짜증 나게 한다고 대놓고 면박을 줬다.

A는 안 되겠다 싶어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고민을 말했고, 상대는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그 고민을 받았다.

마음이 있어야 시간도 낸다.

그 점에선 고맙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하대하는 걸 잘했다고 말해줄 수는 없다.  


B는 평소처럼 A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A가 서론을 꺼내자 B는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것 같았어.


A의 추측이 맞았다.

씁쓸하면서도 시원했다.

그런 것 같았다니.


그럼 A가 이 일을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B는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나.

내 마음을 알면서 지금 시치미를 떼고 전화를 받았나.

어이없으면서도 화가 났다.

그동안 저지른 B의 만행이 의도적이었다는 뜻이니까.


일부러 그랬구나.

역시 예상대로였어.


사실 A가 ‘기분이 나빴다’고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자 B는 무척 당황했다.

A가 B의 언행을 정색하고 문제 삼은 것은 B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기분 나빴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다니.


갑자기 코너에 몰린 기분이었다.

B는 방어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간단명료하게 용건부터 말하자 그러지 못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들키면 밑진다고 여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다.


B는 서운했다 혹은 당황스럽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 분노했다 등의 개념과 자신의 감정을 연결했다.

스스로 욱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말이다.  


A는 B가 말한 ‘그런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질문했다.

상대가 말할 때 그렇게. 저렇게, 그것, 저것, 이것 등 대명사를 자주 쓰면 대화가 따로 논다.

대화의 맥락에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대명사로 받으면 실질적으로 의미로 치환해야 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료하게 해석해야 효율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A: (그런 이야기가) 뭐가 있는데?

B: 네가 나한테 소리 지르니까 나도 같이 소리 질렀어. 네가 힘든 것도 이해하지만 그 이야기(고민)를 계속 들으니까 나도 힘든 거야. 나도 마음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


화제가 약간 뒤틀렸다.

A는 무슨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내용을 물었다.


하지만 B는 본인이 얘기한 걸 말하지 않고, A가 소리 질러서 같이 소리 질렀다고 했다.

내용이 아니라 행위만 설명한 거다.

또 내가 소리 지른 원인은 바로 너의 태도 때문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조건 남 탓부터 한다.  

만약 네가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나도 안 질렀을 텐데.

네가 소리 질러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건가.

내가 소리 지른 건 잘못인데, 먼저 네가 소리 질렀으니까 따지지 말라는 건가.  


그때 A는 몸이 아파서 끙끙 앓고 있었다.

B에게 전화를 해서 괴롭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단지 소리 질렀다고 생각하다니.


A: 소리 지른 기억은 없어. B가 대화하다가 갑자기 나한테 ‘짜증 나게 하네’라고 그랬어.

B: 내가? 그런 말 한 적 없어.


고민하는 척도 안 하고, A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부인했다.   

반사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상대의 말이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할 가능성도 있다.   

맞는 말을 해서 부정할 수도 있고, 일단 부정한 다음에 변명거리를 생각할 수 있다.


A는 B의 부정에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밑도 끝도 없이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는 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근거 없는 주장은 상대가 아니라고 간단하게 반박하면 그만이다.    


A: 그랬어.  

B: 그럼 네가 혼동이 있는 것 같다.


B는 ‘그런 적이 없다’는 첫 방어 카드를 꺼냈지만 실패했다.

이제 A의 기억을 반박할 새로운 카드가 필요했다.

두 번째 방어 카드가 ‘혼동’이었다.

온라인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혼동’은 다른 것들끼리 뒤섞이어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란 뜻이다.

그럼 A가 어떤 기억과 어떤 기억을 ‘혼동’한다는 걸까?

A가 두 개 이상의 기억을 짚어보라고 요구하면 B는 대답하지 못한다.


B는 사안을 판단하고 지적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는 그만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지금 A는 B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B의 예상과 판이하게 다르게 말이다.    


A는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존재다.

모든 인간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평가하며 살아간다.  

B는 그동안 인정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평면적으로 해석한다.

내 말을 잘 따르는 존재로 말이다.

그리고 흑백논리에 익숙하다.

세상을 강자와 약자로만 구분하는 것이다.  

그는 잘 웃고 친절한 사람을 약하다고 여긴다.

상대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타인을 배려하는 건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조건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부려야 강자라고 생각한다.  


A는 장난치는 걸 좋아하고, 잘 웃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덜 하고, 비판도 잘 안 했다.

그래서 B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알았다.

정색하고 따질 줄 몰랐다.

심지어 자신의 말을 일일이 반박하니 굴욕감마저 느꼈다.

그런 감정과 생각을 느끼는 자기 자신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A는 다시 한번 상황을 짚었다.

사실 전화하기 전부터 B가 잘못을 인정하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인정하지 않을 테니 더 강하게 말해야겠다고 판단했다.

A는 물러서지 않았다.


A: 아니, 혼동이 있는 게 아니라 ‘아, 정말 짜증 나게 하네’ 딱 그랬어.

B: 아니야.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B는 같은 말로 부정했다.

A는 B가 한 말과 이후의 과정을 더 자세하게 복기했다.   


A: 그래서 나중에 C한테 하소연했어. ‘B가 나한테 짜증 나게 한다고 하던데?’라고. 그런데 C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  

B: 아니야. 그건 뭔가 혼선이 있는 것 같다.


B는 ‘혼동’에 이어 ‘혼선’이라는 개념으로 결백을 주장했다.

A는 B가 한 말을 기억해서 전달했을 뿐이다.  

A는 혼동이나 혼선으로 기억이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물었다.

B는 뭐라고 답할까?  


A: 무슨 혼선? 어떻게 혼선인가? 어떻게 혼선이 있을 수 있어. 간단한 거야. 들으면 그걸로 기억하는 거지.

B: 네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야?


B는 A가 착각했다고 판단하는 증거를 못 댔다.

대신 새로운 주장을 피력했다.  

바로 A가 혼자서 ‘생각’했다는 것이다.


네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야?

B는 설의법을 사용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뭘까.


망상했다?

착각했다?

현실에서 없었던 일을 누군가가 혼자 일어난 걸로 생각했다?

결국 이런 뜻 아닐지.


앞서 그가 주장한 ‘혼선’과 ‘혼동’과 맥락상 의미가 비슷하다.  

B는 A의 기억을 문제 삼으며 버티고 있다.      


B는 A의 취조에 해명해야 하는 순간이 불쾌했다.

주도권이 뺏긴 것 같다.   

어떤 사람들과 있든 B는 리드하는 게 좋았다.

조언과 충고를 하는 게 그의 즐거움이었다.,

때로 자신의 짜증에 주눅이 드는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도 즐거웠다.


그때만큼은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는 게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배울 만한 인간일 거야.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역전됐다.

B는 코너에 몰린 쥐처럼 일일이 변명하는 듯한 나의 모습에 수치심까지 느낀다.

자존심이 세워보려고 상대의 착각을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질문이 계속 들어오니 방어력이 약해진다.  


A는 B가 말한 것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대충 둘러대는 허술한 공격이 통할 리 없었다.

B가 막무가내로 그런 적이 없다고 우기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녹취라도 해둘걸.   


A는 B의 기억해 전달하는 중이라고 못 박았다.     


A: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들었다니까. (B가) 기억이 없는 거지.

B: 네가 나한테 소리 지른 것도 기억 안 난다며.


사람이니까 기억을 못 할 수 있잖아?

A는 B가 특정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합리적인 추론이다.

누구나 생각할 법한 평이한 답변이다.


하지만 A의 말을 듣고 B는 자존심이 타격을 받았다.

A가 B를 기억 못 하는 사람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B는 스스로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지금 A는 B가 당연히 기억 못 하는 거라고 말했다.


B는 그 말을 듣고 자존감이 내려갔다.

나르시시스트의 능력에 대해 안 좋게 말하면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기억을 못 한다든가, 뭘 모른다거나 하는 종류의 대화 말이다.


심지어 상대가 기억을 못 하는 걸 이해한다면서 나르시시스트에게 아량을 베풀 때 자존심이 더욱 상한다.

그래서 그는 망가진 자존심을 극복하려고 똑같은 주제인 ‘기억력’으로 공격했다.


‘네가 나한테 소리 지른 것도 기억 안 난다며’라고 말한 것은 설의법이다.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서술형 답변이다.


평소 B는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군가를 혼냈다는 에피소드를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A는 B의 허풍이 마음에 전혀 닿지 않았다.

B가 대단한 걸 아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남의 선생 노릇을 하려고 애쓴다는 게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B는 A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종종 자신을 자랑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B는 본인이 한 말도 기억 못 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A는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평이한 말투로 B가 다만 기억을 못 한다고 말했다.

B는 평범한 사람으로 취급당하자 상처를 받았다.


B가 지적을 극복하려고 쓴 처세술은 ‘남의 말 무조건 반사하는 화법 쓰기’다.

그는 비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너도 마찬가지잖아’라고 운을 띄운다.    

네가 나를 지적하지만 그 지적은 너에게도 해당한다, 그러니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프레임을 씌운다.


이 주장은 맹점이 있다.


만약 상대가 자격을 갖추고 말한다면 그 비판은 옳다는 것인가?

B는 A의 비판에 동의하지만 비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비판하는 상황이 불쾌하다는 것인가?


그럼 상대가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갖춰야 B를 비판할 수 있다는 건가?

A의 입을 막으려고 너와 네가 마찬가지라고 우기는 건 아닌가?


B는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래서 해명의 역할을 남에게 떠넘긴다.     


A는 B의 주장에서 모순을 짚었다.


A: 어떻게 혼선이 있어? B는 내가 기억 못 하면 네가 기억을 못 한다고 얘기하고, 내가 기억하고 B가 기억 못 하면 내 기억에 혼선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B: 어...... 아니. 그렇지는 않아.

A: 그럼?


똑같은 상황인데 입장이 바뀌었을 때 B는 다르게 해석했다.


A가 기억을 못 하면 ‘네가 기억을 못 하네’라고 말했다.

B가 기억을 못 하면 ‘나는 기억이 안 나니까 A가 잘못 기억한 거야’라고 말했다.


A는 B가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모순을 꼬집었다.

B는 어떻게 방어할까?


B: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 기억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


돌림 노래하듯이 B는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냥 본인은 짜증 난다고 안 했단다.


여기에서 걸리는 지점은 ‘기억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라는 말이다.

B는 근거도 대지 못하면서 무조건 상대가 혼자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A는 B의 주장을 다시 되돌려줬다.


A: B가 그렇게 말을 안 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대화의 맥락상 ‘착각’ 혹은 ‘망상’으로 읽힌다.

한 명은 기억하고 한 명은 기억이 없다.

기억한 사람의 망상이다.

이게 B의 주장이다.

그럼 상대가 망상이라고 생각한 게 망상은 아닐지.

B는 본인의 주장과 빼닮은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할까?


B: 어... 아닌 것 같아. 왜냐면 대부분 통화할 때 D도 옆에서 듣고 있었어. 어쨌든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별로’ 짜증 난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 나는 ‘짜증 나게 하네’ 이런 말을 안 한다고.


B는 새로운 주장을 시도했다.

당시 대화할 때 동석한 D를 언급한 것이다.

D가 옆에 있었던 게 B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했는지 여부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B가 짜증 난다고 말했다면 D가 말렸을 텐데 가만히 있었으니 A의 말이 틀렸다는 걸까?

D가 ‘B는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걸까?

아니면 D가 그 일을 언급한 적이 없다는 걸까?


B는 A가 짜증 난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말을 교묘하게 바꿨다.

‘별로’라는 수식어를 보니 짜증이 나기는 났었나 보다.


그런데 초반 대화에서 B는 이렇게 말했다.


A: 기분 나쁜 게 있어서 전화했어.

B: 그랬을 것 같아. 계속 반복되는 부분이 있어서 나도 욱했어. 욱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싶어.


A: 뭐가 있는데?

B: 네가 나한테 소리 지르니까 나도 같이 소리 질렀어. 네가 그런 일 때문에 힘든 것도 이해하지만 그 이야기를 계속 들으니까 나도 힘든 거야. 나도 마음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


초반에 B는 A의 말을 들으면서 욱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B는 별로 짜증 나지 않았다고 번복했다.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고 말을 바꾼 것이다.  


A는 반문했다.


A: 그렇게 들은 건 뭐지? 나는?

B: 누구 다른 사람과의 통화해 놓고 오해한 것 아니야?


B는 원래의 주장을 고수하려고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A가 그 말을 들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 B가 말하진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을 B가 말했다고 A가 혼자 생각했다.

이게 B가 나름대로 세워 본 논리다.


어떻게 하면 짜증 나게 하네라고 혼자 생각할 수 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충 기존에 밀고 나가던 ‘혼동’, ‘혼선’과 비슷한 맥락이다.


타인의 말을 기억할 때, 화자가 헷갈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니면 B가 화자를 헷갈려하는 편일 수 있다.

본인이 화자를 착각하니까 남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A: B랑 통화했다니까.

B: 그러니까 언제?


빨리도 물어본다.

B는 그제야 언제 그랬냐고 물었다.

B는 A의 동네에 왔었다.

이후 둘은 다시 통화했고, B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A: B가 나랑 만나고 난 뒤에 다시 통화했었잖아.

B: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만난 후에 통화할 때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A: 단정적으로 B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니 의외인데.

B: 어. 아니 왜냐면 나는 그런 말을 안 하니까.


B는 고장 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A가 구체적인 시점까지 언급하니 B는 부정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재활용한 카드가 그런 말을 안 한다는 결백이다.

이미 통하지 않았던 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은 B가 궁지에 몰렸다는 의미다.


A: 나는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혼선이 있다는 그건 B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

B: 오해를 하는 게 아니고 -


A: 혼선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통화한 시점이 오전인지 오후였는지 기억하고, 그 말을 들을 때 그 방에서 내가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다 명확히 기억해. 혼선은 절대 아니고. B가 했던 말은 맞아.


B: 네가 계속 그렇게 생각을 해온 건 아니고?

A: 응. 아니지.  


B는 방금 무력해진 방어 카드를 재활용했다.

또 A가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B는 ‘상대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주장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B: 왜냐면 서로 통화하다가 흥분한 적이 한 번 있었어. 그런데 그전에 전화해서 네가 얘기하면 나는 계속 들으려고 했어. 내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마음으로 통화를 하는데. 내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너한테 말할 상황도 아니고.

B는 새로운 방어 카드로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웠다.

A의 입장을 생각해서 좋은 의도로 통화했다, 그러니까 내가 나쁘게 대할 리 없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A가 기분 나빴던 일을 말하면 B는 공감력이 떨어지는 태도를 종종 보였다.   

A가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피상적으로 반응했다.

아니면 비웃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는데 자신이 양심상 어긋나게 행동할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전에 A와 대화할 때 욱해서 말이 안 좋게 나간 걸 인정했었다.

지금 와서 네가 힘든데 내가 짜증 난다고 말할 리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B가 말한 ‘혼동’ 아니면 ‘혼선’이 있는 상황이다.  


A: 그렇게 말할 상황이 아니지만 B 입장에서는 짜증 나지. 나는 이건 뭐 나의 문제이니까.   

B: 아니. 나는 내가 진짜 통화를 하다가 짜증이 났더라도 내가 너한테 짜증 난다고 말을 하겠냐.


A: 말을 했다니까.

B: 짜증이 났어도 그러면 끊고 혼자서 짜증 나게 하네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너랑 통화를 하고 있는데 그러는 너한테 짜증 나게 하네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A는 그 상황에 대해 다시 묘사했다.


A: 나한테 거의 소리 질렀어. 짜증 나게 하네  

B: 말을 했잖아.


A: 뭘 말해?

B: 마음이 안 좋았던 적은 그날 한 번 뿐이었다니까. 그리고 4월에 다시 네가 전화했잖아. 안부 묻고 얼마 안 돼서 끊더라고. 그게 통화한 전부야. 그전에 통화할 때 내가 짜증 나게 한다고 말했다고?


A: 4월에 통화했을 때 B가 언제 만날까라고 말하면서 내 말투를 흉내 냈잖아. 그런 통화하기 전에 통화한 것 말이야.

B: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약간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통화했던 건 사실 그때밖에 없거든. 그리고 그전에 계속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내가 그 상황에서 짜증 나게 하네 말할 수가 없잖아.


B는 말을 번복했다.


4월에 A는 B에게 전화했다.

A는 언제 만날지 물었다.


그런데 B는 A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A의 말을 흉내 냈다.

언제 만날까? 흐흐흐흐.

B는 귀신 들린 사람처럼 웃으며 혼자 자지러졌다.  


A는 B가 4월에 통화할 때, 본인을 흉내 냈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B는 A의 말을 에둘러 인정해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안 좋게 통화한 것은 그때뿐이라고 자진납세했다.

즉 4월에 통화할 때 우리가 안 좋은 감정을 주고받았다고.


처음에 B는 4월의 통화는 짧아서 짜증 난다고 말할 만한 시간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A가 4월에 B가 A의 말투를 따라 하며 빈정거렸다고 말했다.

그 예길 듣고서 B는 4월에 안 좋게 통화한 걸 인정했다.

그리고 4월에 통화할 때 말고는 나쁜 감정이 없었단다.


아니, 방금 4월에 짧게 통화해서 짜증 날 겨를이 없었다고 결백했다.

이제 와서 그때 감정이 안 좋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럼 B가 그때, 그날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실체 없는 주장이다.  


A: 그렇게 말을 했지. 말할 수가 없는 건 아니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

B: 아니, 그런데 뭐가 짜증 나는 상황이 있어야 그렇게 말하지.


A: 내가 계속 힘들다고 하니까.

B: 그거야 네가 힘들다고 어렵다고 하는데 전화받는 것 때문에 내가 짜증 나서 짜증 나게 한다고 그러겠어?


A: 그랬어. B가 기억 못 한다고 B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야. 난 그런 말을 들었어. B가 통화를 잘하다가 갑자기 진짜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해서 내가 깜짝 놀랐어.  

B:................. 하.....(침묵)


A: 지금은 진짜 짜증 나지?

B: 아니. 짜증이 난다기보다는. 그러니까 너랑 나랑 너무 답 없는 대화를 하고 있잖아. 나는 기억이 없지만 -


A: 왜 답이 없어?

B: 왜냐면 나는 전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는데. 너는 그렇게 나랑 통화를 하고 들었다고 하고. 나는 그런 말 한 기억이...


A: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지.

B: 그러니까 봐봐. 그러면 나는 없는 걸 지어내? 내가 이 상황에서 네가 기억하는 걸 사실로 받아들이고 아 그랬구나 미안하다 이렇게 하기에 -


기억이 안 나는 것과 들은 말을 기억하는 것이. 서로. 비교대상이. 되나?

A가 없는 말을 지어낼 리 없다고 하자 B는 A가 말한 논리를 복사해서 따라 했다.

나도 없는 걸 지어내지는 않지라고.

그 말을 하는 B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했다.

A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 하면 코너에 몰린 자신이 유리할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A: 그냥 기억이 안 나는 것 아닐까? 말 그대로.

B: 나는 기억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뭐 어쨌든 간에 기억을 안 나는 건 - 네가 잘못 기억하는 것은..


‘어쨌든’이라는 말은 화제를 돌리고 싶을 때 쓴다.

B는 상대의 논리를 복사해서 대칭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방금 A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건 의미 없는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그 카드가 먹히지 않았다.

이제 그는 무작정 ‘네가 잘못 기억한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B는 A가 잘못 기억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본인이 기억이 안 나는 것을 ‘A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라고 고쳐서 말했다.   

이럴 때 짚고 넘어가야 한다.


A: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 B가 그렇게 말을 했어.  

B: 그러니까 너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고


또 방어 카드를 재활용했다.

혼자 생각했다는 거다.

무슨 뜻인지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지금 B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표현이 나름대로 무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말하려고 무조건 남이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는 문장을 덧붙인다.


B는 A의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

역시 이럴 때 바로잡아야 한다.


A: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B: 그러니까 나는 전혀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초반에 B는 A의 말에 욱해서 안 좋게 말했다고 인정했다.

A가 기분 나쁠 걸 알고 있었다는 제스처도 취했다.

지금은 짜증 난다고 말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을 바꿨다.


처음엔 네가 소리 질러서 욱했다.

좀 있다가 짜증 난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한참 지나서는 짜증 난다고 말할 이유가 ‘전혀’ 없다.

B는 상황에 맞춰서 계속 진술을 번복했다.


A: 그럼 내가 기억이 안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B가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네? 그렇지?

B: 어..........(침묵)


B는 본인이 기억하는 것은 다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다 가짜라고 믿었다.


A: B는 그런데 무조건 똑같이 기억이 없는 조건에서 내가 기억을 못 하면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게 되는 거고. 내가 기억하고 B가 기억 못 하면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되는 거야?


A는 B의 주장의 논리를 그대로 되돌려줬다.

이제 B가 B의 말을 부정해야 한다.

B는 어떻게 말할까?


B: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B는 A의 말을 정면 반박하지 못했다.

너도 마찬가지라는 뜻은 결국 A의 말이 맞다는 거다.


여기에서 잠시 이전의 대화로 되돌아가자.


A: 어떻게 혼선이 있어? B는 내가 기억 못 하면 네가 기억을 못 한다고 얘기하고, 내가 기억하고 B가 기억 못 하면 내 기억에 혼선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B: 어...... 아니. 그렇지는 않아.


A: 그럼?

B: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 기억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


A는 같은 말을 했는데, B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B는 새로운 주장을 끌고 왔다.

바로 ‘그렇게 말하는 너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이건 A가 B를 비판할 자격을 박탈하기 화법이다.

B는 A의 비판을 부정하지 못하자 A의 태도와 B의 태도가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자, 여기에서 무엇이 마찬가지인지 내용을 물어야 한다.


A: 뭐가 마찬가지야?

B: 너도 네가 기억하는 걸 맞다고 생각하고


A: 내가 기억이 없지만 B가 그렇게 말하면 인정하는 거잖아. 내가 없던 일이라고 말했어? 모든 순간을 기억하기 힘든 거야. B가 나랑 통화할 때 말한 내용을 내가 기억 못 한다고 그런 일 없다고 말하지 않았어. 나 마찬가지인 것 절대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해?

B:..............................................(정말 긴 침묵)


B의 논리는 틀렸다.

A의 반응과 B의 반응은 맥락이 다르다.

A는 내가 기억이 없으니까 B의 기억이 잘못됐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기억이 있는데 상대가 기억이 없다면 단지 기억을 못 하는 거지 없던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B는 자신과 상대를 단순비교해서 주장의 오류가 생겼다.


A: 워낙 B가 비판적 성격이라는 건 알겠어. 그걸 나쁘다고 한 게 아니라 나는 B의 표현법에 대해 얘기하는 거야.

B: 나의 표현에 대해서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는 거야?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다.

‘지금 네가 (감히) 나한테 조언하려는 거야?’

이런 뜻이다.


A가 B에게 조언하는 게 맞다.

B는 본인이 비판할 것만 본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런데 타인이 조언하는 것 같으니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언이 대화의 핵심은 아니다.

B가 A에게 무례했다는 게 중요하다.   


A: 그게 기분 나쁘다는 거지.

B: 그렇게 이야기한 것들이?


A: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쁜데 의도한 건지 의도 없이 한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의도인지 아닌지.

B: 그러니까. 얘기하는데 기분 나쁘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얘기하는데 기분 나쁘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라는 말은 비현실적이다.

타인의 기분을 건드리려고 악의를 담아 말하는 사람은 많다.

특히 B 같은 유형 말이다.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닌 듯하다.


A: 그런 사람도 있지.

B: 그러니까 그런 의도로 한 건 아니니까.


B는 말을 다시 바꿨다.

처음엔 이랬다.

야, 세상에 나쁜 의도로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다음엔 이랬다.

야, 내가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야.

첫 번째 주장을 스스로 뒤집은 셈이다.


A: 그동안 통화를 하면서 B가 나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도 있었지.

B:.................


언제부턴가 B는 A와 대화하면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초반에 B는 A에게 존댓말을 썼던 것과 상반된 태도였다.


A는 친해져서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사실 B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곤 했다.

예전에 A는 직장에서 선배와 부딪힌 적이 있었다.

그 선배란 작자는 A를 싫어했다.

명령조로 일관하고, 먹다 남은 과자를 주면서 A를 괴롭혔다.

A는 참다못해 화를 냈다.

선배는 그 일로 상처를 받았다.


나에게 은근히 쓰레기를 밀었다.

셀카를 찍는데 뒤에 내가 나온다며 야멸차게 비키라고 핀잔준다.

한 번 버럭 했다고 어쩔 줄 몰라하다니.

그녀는 생각보다 맷집이 약했다.


신입이자 나이도 어린 A가 선배이자 나이도 몇 살 위인 작자에게 정색했다.

서열에 민감한 사람은 충격이다.

그런데 세상에 서열이 다는 아니다.

세상은 다양한 요소가 종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A는 작자의 후배이기 전에 화낼 줄 아는 인간이다.

그리고 회사 밖을 나오면 A에게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작자는 그 점을 간과했다.


하여튼 그 일을 겪고 B에게 푸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B는 A에게 바가지(싸가지)가 없다고 핀잔을 줬다.  

B의 입에서 나온 바가지(싸가지)라는 단어에 A는 살짝 놀랐다.   

내가 가해자도 아닌데.

난 하대 받았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나 보고 지금 바가지가 없다고 막말을 하다니.


그러니까 ‘얘기하는데 기분 나쁘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말하는 당사자가 B다.

싸가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상대가 기분 좋을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닐 테지.    

B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어려워하는데 A는 분노하는구나.


그는 마음이 어렵다는 것과 분노하는 것을 구분했다.

하지만 지금 분노하는 A가 어려워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의도적인 단어 선택이다.

자신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하면 약자가 된 기분일 것이다.

그 감정을 인정하기 싫어서 상대가 어려워한다고 동의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분노하는 게 당연한 건데 B는 대개 사람들이 하대 받는 상황에서 어려워한다고 주장했다.


A: 싸가지가 없다고 한 건 좀 그렇지.  

B: 내가 너한테 싸가지 없다고 말했어?


A: B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는데 오히려 B는 날 상대로 선배 놀이하고 싶어 하는구나.

B: 하하. 내가 너한테 싸가지가 없다고 말했다고?


B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A: 응. 내가 다른 사람한테 한 행동을 B한테 말했어. 그런데 네가 그렇게 하면 싸가지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바가지가 없다고 말했어.

B: 바가지가 없다고 했다고?


B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번 더 되물었다.


A: 맞아.

B: 나는 그런 말을 쓰지도 않는데?


나는 싸가지나 바가지라는 단어를 안 써.

이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뭘 보고 본인이 평생 그런 말을 쓴 적이 없다고 확신하나?


A: B가 기억을 못 하는 거야. 나는 다 기억한다니까.  

B: (같이 있던 D에게) A가 내가 기억 못 하는 것뿐이래.


A: 나는 다 기억한다니까.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지금 나 앞에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거야?

B: 아니, 옆에 D가 있다니까


B는 뜨끔했는지 말을 돌렸다.

옆에 누가 있는지 물어본 게 아니다.

D가 동석한 걸 이미 알고 있다.

A의 말은 왜 나한테 얘기한 걸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냐는 거다.

유치하게 나오지 말라는 경고다.


A: 그건 알아. 그런데 지금 나랑 통화하는 거잖아.

B:.... 어..


B는 말을 잇지 못했다.

A가 말하고자 한 걸 알아들었나?


A: 지금 다른 사람한테 내 이야기하는 거 지금 내가 생중계로 듣고 있는 거야?

B: 아.....


A가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B는 여전히 대답을 못하고 있다.

D도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다.


A: 나 그런 거 모욕적인데?

B:...................


A은 본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어퍼컷을 맞은 B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다.


B는 D가 옆에 있길래 말했다지만 이건 부분적 사실일 뿐이다.  

타인에게 A를 에둘러 욕하고 싶다는 의도를 생략했다.  


B는 들으란 듯이 D에게 ‘A가 나 보고 기억을 못 했을 뿐이래’라고 말을 전했다.

B는 듣고 있던 A를 의식했다.

그래서 목소리 크기를 낮추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의 저의를 잘 알 것이다.


B는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을 수 있다.

그래서 격노한 나머지 과하게 반응했을 수 있다.  

아니면 혼자서 방어하는 게 벅찼을 수 있다.

D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느라 말을 전달했을지 모른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 D와 함께 있다고 암시해서 내 편이 있다는 것을 과시했을 수도 있다.


물론 A는 B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상관없었다.

B는 A가 마음에 안 들면 대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A에 대해 앞담화했었다.


그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군.

A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아량을 베푸는 차원에서 A는 B에게 퇴로를 열어줬다.


A: B가 기억 못 할 수 있어. 그동안 많은 말을 했으니까. B가 하는 말 중에 나도 기억 못 하는 것도 있을 거야.

B:........ 알았어. 그러면..


A: 예전에 나한테 (B가) 선배한테 알아서 기어라고 말을 한 적도 있는데 모욕적이었어.  

B: 선배한테 알아서 기어라고 말했다고? 내가?


A: 응

B: 언제?


A: 알아서 기어. 기어라 말고 기어라고 명령조로 얘기하더라고.

B: 알아서 기어라고 내가 너한테 말했다고?


A: 선배한테 B가 많이 기어서 나한테 상처를 전가하는 건가 싶었어

B: 선배들한테 알아서 기어라고 했다고?


A: 응. 알아서 기어라.

B:.......................


A: 내가 고마운 마음에 저자세로 나가서 B가 날 얕잡아 보고 무시하기 시작하는 건가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

B:................. 그래. 그래.


A: B도 사람이니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게 사람 인격을 모독하는 거잖아.

B:.................................


A: B도 선배한테 그런 대우받았을 수 있지.

B: 어....


B는 A의 예측에 갑자기 동요했다.

맞나 보다.  


A: 선배한테 겪은 대로 후배한테 하잖아.

B: 나는 윗사람한테 알아서 기는 문화를 좋아하지도 않고.


A는 꼰대 문화가 취향이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A의 질문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답을 하지 못했다.


A: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

B: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은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말은 언행에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거다.

B는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을 때 모르겠다고 답하는 유형이다.


A: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야?

B: 일단 너는 전화해서 어쨌든 네가 들은 부분이 마음이 어렵다는 거지?


B는 A의 물음을 지나쳐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마음이 어렵다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미 다 한 얘기다.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굳이 정리해서 되물어야 했을까.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정말 몰라서 물어?

본인도 잘 아는 걸 되물었다.


이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그리고 A는 마음이 어려운 게 아니라 화가 난 거다.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니까 넘어가자.


A: 응. 그렇지.

B: 그래.


 A는 B의 행동을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죄목을 물었다.

하지만 갑자기 B는 상담사로 변신했다.

한 떨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상담은 B의 역할이 아니다.

사과하는 게 B의 역할이다.


B가 A와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초등학생처럼 어쩌고 저쩌고.

성인에게 초등학생이라는 건 명백하게 모욕적인 언사다.

B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다.  

만약 A가 B에게 초등학생이라고 말했다면 상처받았다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A: 나한테 초등학생 같다고 말하면서 비웃는 것도 좀 그렇잖아.

B: 얘기가 늘어나네.


A: 뭐가 늘어나?

B: 그날 D도 같이 들은 거잖아. 셋이 이야기한 거잖아. 너는 그렇게 들었지만 우리는 그런 기억이 없다면 우리가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전제가 틀렸다.

B와 D 둘 다 특정 일을 기억 못 할 수도 있다.

A는 상식적인 질문엔 답하고 싶지 않았다.


A: 들은 사람은 누구지?

B:.. 셋이 같이 -


A의 설의법을 썼다.

나는 들었는데 상대는 기억이 없다는 이유로 내 말을 부정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B는 질문의 의도를 비켜갔다.  


A: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나야. B나 D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야.

B: 내가 너한테 초등학생 같다고 말한 걸로 기억한다고?


A가 이미 한 말을 B는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대답이 궁색해지니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심산인가.


A: 응. 정말 기억 안 나? 충격인데. 말한 사람은 기억을 못 하더라. 들은 사람만 기억해. 왜냐면 그게 상처가 되니까.

B: 그러게. 앞으로는 대화할 때 녹취를 해야겠나.


B는 흥분한 나머지 ‘녹취’를 운운하며 비아냥거렸다.

지금 본인이 대화를 녹취 안 해서 모함받고 있다는 거다.

녹취했다면 증거가 분명한데 진실공방으로 흐르는 게 억울하다는 취지다.

정작 녹취를 안 해서 곤란한 사람은 A인데 말이다.  


A: 나야말로 녹취를 해야겠다. 억울해.

B: 그래야겠지.


A: B는 B와 생각이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생각해.

B: 너도 그건 마찬가지잖아.


A: 지금도 마찬가지야. B가 기억이 없으니 남이 잘못 기억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다 남이 문제라는 거야.

B: 나랑 D가 그런 얘기를 듣거나 한 적이 없다고 해도 어쨌든 너는 네가 들었으니까 우리가 둘 다 잘못됐다는 거지?


A는 B와 생각이 달라서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A는 기억을 전달했다.

기억은 생각과 다르다.

기억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전달하는 것이다.

분석하고 평가하는 생각을 거쳐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B는 D를 끌어들일까.

D랑 이 부분을 충분히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D가 기억을 못 한다고 확신하는 근거가 뭘까?

A에게만 안 들리게 서로 수어로 대화했나?

아니면 입모양으로 대화라도 주고받은 건가?

필담이라도 한 건가?


A: D는 그렇게 말하라고 B에게 시킨 건 아니니까 (지금 이 대화에서 D는 상관없지). 그때 옆에 있었던 거지.

B: 그러니까 같이 옆에 있었잖아.


A: 나는 B가 나한테 한 말을 말하는 거야. D에 대해 말한 적 없어(말한 주체를 문제 삼는 거지, D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 없어).

B: 셋이 같이 얘기했잖아.


A: 그래서?

B: 같이 앉아서 -


A: 같이 있었지.

B: 서로 들었는데. 무슨 이야기했는지 서로. 기억을 하잖아.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느끼면..


A: 느낌이지?

B:....................


A는 다시 설의법을 썼다.

B는 대화 중에 처음으로 아주 길게 침묵했다.


B는 느낌을 기반으로 A의 말을 부인했다.  

본인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느끼면’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A는 B의 판단력에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지고 시시각각 변하는 ‘느낌’ 때문에 그토록 A의 기억을 부정한 것인가.


A: 느낌이잖아.

B: 알았어.


체념한 듯이 B가 대답했다.


A: 내가 들었다는데

B: 어, 그래


A: 똑같은 상황에서 B가 기억하고 내가 기억 못 하면, 그게 B가 겪은 일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B:..... 어쨌든 알았어.


‘어쨌든’은 A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기억을 못 한다고 없던 일인 것은 아니다.

A가 설명할 필요 없을 정도로 상식적인 답변이다.  

B는 이러한 상식적인 판단을 못하는 것인가, 안 하는 것인가.  


A: 언젠가부터 B가 태도를 바꿨어. 이건 오해일 수 있지만. 그때 B가 갑자기 나한테 너는 우기는 게 있다고 말했어.

B: 우기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A: 아니 -

B: 네가 우긴다고 생각을 안 하거든. 우긴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일 거야.


A: 너는 좀 주관적인 것 같아. 이런 이야기도 했었어

B: 맞아.


A: 욱 하는 마음 들어. B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B: 아 그랬어? 아...


B는 즐거워면서도 어이없다는 듯이 A의 판단력을 대놓고 무시했다.

내 말을 상대가 기분 나쁠 거라고 예상할 때, 억지로 웃는 경우가 있다.

B가 딱 그랬다.


A: 그럼 내가 B는 생각이 주관적인 것 같다고 말하면 기분 나쁘잖아.

B: 맞아. 나도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


A: 그건 기억나?

B: 그건 맞아. 네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A: 그러니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기분은 나쁘지. 당연히. 날 무시하는구나..

B: 그렇지.


A: 그래서 내가 욱하는 마음에 B는 그럼 객관적이냐고 물어보니 ‘응. 난 객관적이지. 그런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나를 마음 편하게 무시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했어. 하여튼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기는 게 있다고 말한 시점부터 B가 태도를 바꿨다는 거야.


B: 어쨌든 우기는 건 아닌 것 같아. 네가 우긴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 우기는 건 내 성격인데.

B는 자신의 단점을 남의 단점이라고 말한 거야?  

예전에 확신 어린 태도로 우긴다고 했다.

그때도 이유는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런데 A가 그 점을 지적한다고 느꼈는지 B는 말을 번복했다.

본인이 우긴다고 커미아웃까지 하면서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잘 우긴다.

우기는 게 당연하다.

그가 대단한 사람임을 확증받으려면 편법을 써야 한다.

무엇이든 내가 잘했고 남이 잘못했다고 우기는 게 제일 쉽고 빠르다.


나르시시스트는 미약하고 무지하다.

잘못을 인정할 용기도, 자신이 누구인지 객관적으로 분석할 혜안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코너에 몰리면 일시적으로 더 기세등등해진다.

상대가 지적할 자격이 없거나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우긴다.

착각 혹은 망상한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면서 우긴다.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이라고 우긴다.

우기고 또 우긴다.

그러면 이길 줄 알고 우긴다, 나르시시스트는.


나르시시스트의 교묘한 공격을 무력화시키려면 그의 말 하나하나를 해부해야 한다.

논리의 칼로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때그때 정면으로 피드백해줘야 한다.


일단 잠시 나르시시스트의 횡설수설함을 감상하자.

그리고 그의 말을 녹취하자.

녹취록을 타이핑하자.


나르시시스트는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처세술을 쓴다.

교활하고 은밀하게 단어를 바꾸고 어감을 달리한다.

타인의 질문에 동문서답해서 화제를 돌린다.  

어떻게든 자기 뜻대로 대화를 이끌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타이핑한 것을 보면 나르시시스트의 논리적 허점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나르시시스트의 비합리적인 사고를 정리하면 우리의 대응이 더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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