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일까?
아침 거리에는 바람 한점 이 없다. 아무런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오전의 공기는 사뭇 맘과 같아진다.
이른 새벽을 맞이할 수 없지만, 아무도 깨지 않는 고요를 난 맘으로 맞이하는 오늘 이다. 가빈의 내적인 조용하고 그의 생각이 새벽을 지나 아침을 깨우면 언젠가 보았던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이며 부서져 버린다. 바다에 혼자 서 있는 가빈이. 벅차오르는 거 없이도 눈물을 삼킬 줄 아는 나이가 된 여인. 아릿하게 관자놀이를 누르는 살짝의 고통이 불편하지 않고 앓는 것에 익숙해진 나이. 어른일까?
가빈의 캐나다 방문은 두 번째였다.
오빠내외가 이민의 자리를 막 잡기 시작할 즘. 가빈은 가족을 이끌고 광활한 자연을 품은 캐나다로 여행을 했었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비행시간을 보면서 이리도 먼 곳까지 오게 된 오빠의 결심을 진정으로 알고 싶었다. 가족의 여행은 오빠의 친절함과 잘 짜인 여정으로 좋은 기억을 가득 안았고, 이후 삶의 방향을 잃을 때마다 오빠와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10여 년이 지난 후, 조금은 달라진 외모와 깊어진 지혜가 잔뜩 묻어나는 오빠를 마주 한 가빈이었다.
'오빠, 건강은 좋아 보이는데?'
'이젠 은퇴도 했고, 조용히 내 할 일 하며 사니까. 어려울 거 없어. 넌 어떠니?'
가빈에게는 한 참이나 커다란 오빠였었고, 가빈의 탄생부터 성장의 자람을 보았던 오빠였지만, 이제는 같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오빠와 가빈이었다.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확신이 없어 자문할 때가 빈번한 삶에서 오빠의 환경. 어린 기억. 조금 자란 세월. 정리가 필요했던 시절들 모두 시시하고 재미없는 소재 일 수 있지만, 오빠와 가빈에게만 큼은 어느 파인다이닝에도 오를 수 없는 품격 있고 정갈한 음식 들이었다.
록키산맥의 아래동네 즘에 위치한 집은 인생의 굴곡 만큼이나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예상치 못한 날씨를 맞이했다. 쨍쨍하고 햇살이 가벼운 날에도 이내 우박을 떨어뜨려 널어놓은 빨래를 걷으려 뛰어가야 했고, 한기가 올라올 만큼의 기온으로 시작한 오전은 겉옷을 내어 주어야만 하는 온화한 날씨로 널뛰기를 했다. 잠깐의 방문인 가빈에게는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겠지만, 생활을 이어 나가야 하는 거주자들에게는 난감한 일이겠다 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언니의 부름으로 둘에게 알림을 주었다.
'아이고, 고모, 안 힘들어요? 여기까지 비행하고 왔는데, 당신이 너무 붙잡고 있는 거 아냐?'
오랜 사이에서 묻어나는 건조하고 , 형식적일 수 있지만 부부의 냄새가 풍겨 나는 대화였다.
부드러운 잔소리. 채근하는 듯 하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스러운 말투들. 가빈은 언니와 오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40여 년을 살아가는 부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어떤 것들 인지. 그들 에게 가족의 의미를 부여해 준 아이를 위해 치열하게 달려온 후의 절대 분주 하지 않아도 될 삶 이란 어떠한 것인지. 살아감에 지침을 호소하며 가진 것에 소중함을 알면서도 삐뚤게 살아가보려 했던 시절들 또한 그들은 어찌 견뎌 내었는지. 넘어지지 않으려고 밑바닥의 에너지까지 쓸어가며 타국 생활은 얼마나 고달팠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쓰럽기보다 시간과 함께 배려와 풍성함과 여유를 얻은 듯한 오빠내외의 모습은 가빈에게는 또 하나의 부모와 같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메이리 예요.'
'반가워요. 어쩜 이렇게 예쁠까?'
가빈은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조카는 타국에서 눈망울이 예쁜 아이와 결혼을 했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메이리였다. 조카의 눈보다도 코 주변을 닮은 아이. 얇은 빰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새하얀 솜털.
'고모. 오래 있다 갈 거지?' 조카의 한 마디가 너무 반갑다
'아냐. 표 예약해 뒀어. 오래 비워 두면 학생들 떨어져 나가.'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과 투박한 식기의 부딪는 소리, 일상의 얘기를 주고받는 가족의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빈은 생각한다
'난 왜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오빠내외는 모든 것을 잘 그어내고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잘 못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빠르게 접어 밥 위에 올려 울컥 삼켜 버린다. 난 어른이니까.
유치원을 다니던 메이리는 매일 같이 가빈과 책을 읽고 떠듬떠듬 한국말로 자신을 표현하며 할아버지에게 배웠다며 한국 동요를 들려주곤 했다. 익숙함 뒤에 오는 편안함이 지침을 유발할 쯤에 선물로 다가온 메이리는 오빠 내외에게는 매번의 계절과 같겠구나 생각했다. 여름이 되면 선선한 가을 이 올 거라는 기대와 예상이 생겨나듯 메이리의 단단한 성장을 기대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빠와 메이리 셋이서 집 앞의 산책을 나갔던 날 이었다
어느 잡지에서 보았던 가벼운 먹구름은 능선을 따라 지붕위에 둥실 떠 있었다. 더 조금 걸어가면 구름과 인사를 할 지 도 모를 것 같은 착각 마저 일으킬 정도 였다. 장관 이였다. 오빠는 물었다.
'가빈아. 천천히 살아. 그리고 너무 애쓰지 말고.'
안경 안으로 고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침을 꿀꺽 삼켜 내고 만 가빈이
'저 꼬맹이가 우리의 매일 이야.'오빠는 인자한 웃음으로 가빈을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