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었으니까

에필로그

by 여니

거울 속에 는 성숙 한 여인의 모습이 비쳐진다.

귀 밑 머리에 올라온 하얗게 반짝이는 것을 한 참이나 살펴본다.


’ 세상에나.. 이거 흰머리가 잖아? 이젠 여기까지??....

분명 지난번에 한 녀석이 올라온 걸 보고 과감하게 다신 나오지 못하도록 뿌리 채 뽑았었는데..

언제 넌 또 내게로 온 거야?? 나 원, 참 못살아.’


집게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이 났다. 후다닥. 더 이상 가만 두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집게를 집어 드는 순간

비장한 각오로 무찌를 생각에 들어 올렸던 손가락을 이내 거두었다.

욕실 불빛에 너무나 황홀한 빛을 내는 가빈이의 일부.

‘예쁘다. 어쩜.’

‘너도 이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겠지? 이리 와. 어서 와. 여린 싹처럼 반들거리고 고운 나의 흰머리여.’

가빈은 아껴 주고, 보살펴 주고 , 응원해 주기로 했다.

가슴이 따스했다.

향이 좋은 싱글 오리진의 커피 한 잔의 온기가 더욱 그리웠다.

이때,

날아든 건강검진 문자

‘12월 이면 올해 건강 검진 마지막 휴일입니다. 잘 확인하셔서 가빈 님의 무료 검진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 아. 그렇구나. 며칠 안 남았네.’

부리나케 접수를 하고 마지막 일요일의 검진에 안착했다

문진표

여러 항목을 체크하다가 발견 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생활 습관에 관한 문항’

5-6 최근 1주일간, 평소보다 숨이 조금 더 차게 만드는 격렬한 운동을, 하루 30분 이상 시행 한 날은 며칠입니까?


신발 장 안의 노란빛을 띤 낮은 구두. 이걸 언제 신었더라? 정갈하고 단조로운 옷 장 안쪽에 한 번도 꺼내 입은 흔적도 없이 고이 모셔둔 몸의 선이 드러나는 검정 원피스. 코디가 좋았던 땡땡이 검정 스타킹.

가슴속의 일렁임은 무엇 인가 에게 열정을 쏟았을 가빈이의 시절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 그렇지 가빈이의 동그라미 안에는 결혼. 삶, 아이. 일 그리고 ‘사랑’ 들이 있었다.

익숙함과 편안함이 가져다준 짜릿하고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했던 일들

성숙한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출산’이란 버겁고 고통스럽지만 ‘탄생 ’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지만, 열심과 성실 이란 실타래로 메꾸어 가고 완전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내려고 분주했던 일들

설거지를 해 주지 않아, 재활용을 제대로 하지 않아 격렬하게 남편과 싸웠던 날들

우스운 잣대로 인해 부합되지 못했단 이유로 아이들을 질타하고 어리석게 굴었던 가빈의 욕심들

가족 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존중하지 못해 큰 소리가 났던 북적이던 날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여 가장 아름다움을 자랑했음에 아무도 비난할 이유가 없던 시간과 공간들

진심 이었으니까

가슴을 뛰게 신이 났던 일이 언제였지?

가빈의 쑥 올라온 은빛의 머리색은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알려 주었다.



‘어머니. 돌아가셨어...’

두 계절 아니 한 참이나 흐른 뒤였다. 롱디남에게 있어서 어머니. 그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 이외에도 롱디남의 인생에서 어떠한 존재였는지 모를 리 없었다. 마지막 연락 후 롱디남을 향한 마음의 결심을 한 뒤였지만, 부재란 의미를 알기에 한 시절 그를 품었던 여자로서 아니, 그를 무척 잘 아는 한 사람으로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아냐. 내가 다 정리하고 연락할게’

자신의 을 절대 넘도록 허락하지 않았던 남자. 자신을 둘러싼 공간은 철저히 개방하려 하지 않았던 그 사람. 생각이 복잡했다.

하지만, 롱디남의 답 변은 가빈의 결심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매일을 채우고 살아 내었음 에도 이렇다 이름 지을 것 없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날을 열심히 살아가는, 여전히 평범한 가족 이란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냈다



세월에 눌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 야 하는 또 다른 가빈의 자아를 위해

오전에는 햇살 좋은 창 쪽을 향해 빨래를 널고

오후에는 에너지 가득한 아이들과 끝도 없이 말싸움을 해가며 쉬지 않는 날을 보냈다. 그들의 재잘거림과 순수함이 주는 공간을 가빈은 격렬하고 가슴 뛰게 보내고 있었다.

생각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주 생각 하곤 했다. 시험 기간 이 지나고 조금 한가해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의 그림들.

급작스럽게 내려간 추위에 생각 나는 문자 ‘ 옷 잘 입고 가. 춥다.’ 걸음마다 숨소리가 같이 걸었고, 그때마다 가빈은 숨을 고르지 못해 한 참을 서성 여야만 했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말 들


사람을 잃는다는 것

나를 지탱해준 몸통. 뿌리들이 잘려 나간 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맞이해 야 하는 헤어짐을 마주 해 보지 않은 사람 들은 모르는 것 들

억지로 라도 붙들고 싶어 했던 삶의 끈을 향한 그들의 눈빛을 가빈은 늘 잊을 수 없었다.


놀이터는 시끄럽고 분주하다

정글 짐에 올라가 거꾸로 매달린 아이

끝 도 없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뺑뺑이

높이 솟아오르는 시소는 하늘의 구름이라도 따 올 듯하다

쾌활함과 밝음이 늘 함께 하는 곳

숨이 고플 때 가빈은 여지없이 놀이터를 향했다.



맑은 햇살이 말을 걸어와 창을 열었다가 금세 닫아 버렸다.

’ 엄마. 나 추워. ‘

’ 아이. 미안해. 오늘 안에 속 옷 입고 가야 하겠네.‘

날이 좋았던 어느 날 가빈은 남편과 아주 오랜만에 풍경이 좋은 곳에서 식사를 마쳤다. 지나가던 사인 보드에 걸린 명품 백을 보고선 던진

남편의 한 마디

‘당신. 저 거 하나 사줄까?. 당신에게 아 주 딱 인 듯한데 말이야’

명품 가방은 오직 가빈을 위해 단 하나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가빈의 것 만을 가지고 싶어 했다

오롯이 그녀만을 위한 사람

반드시 그녀 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이야기 들

그녀만 아는 이야기들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 은 오직 반드시 가빈이 의 것 이기를

가빈은 이제 우선순위를 알고 있다

가빈이 정확히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 이였는지.

잘할 수 있는 것 만 해보기로 한다

잘 버터 보기로 한다

어려운 일이 지만, 싫증 나지 않는 일.

지겨운 일이지만, 제일 잘 견뎌낼 수 있는 일. 아이들과 호흡하는 일

글을 써 보고 싶었다. 대단한 글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글 말이다.


자전거를 들고 나타나는 롱디남은 여전히 가빈의 주변을 존재하고 있었다.

달라진 서로를 알아 차린 채로.

롱디남도 가빈만큼이나 끈을 놓기 두려워하는 닮은 꼴이지 않을까?

둘 은 알고 있다

이제는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을.




미미하고 심심한 저의 글 읽어 주시는 소중한 분 들

곧 다시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