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아버지. 애가 돌도 되기 전인데 이렇게 얄밉게 말씀하셨다.
<딩크족의 꿈은 바이 바이>
난 딩크족이 되고 싶었다. 수도권에는 그런 사람 많다더니, 아랫동네에선 어림도 없었다. 결혼 전 넌지시 물었더니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두 명은 있어야겠죠?" 했다.
남편은 빨리 애를 낳자며 임신 시기를 3개월 뒤 정도로 말했다. 딩크족은 고사하고 신혼도 없다고? 갑자기 서러웠다. 자취방 앞에서 서럽게 울었다.
"난 당신에 비하면 아직 어리고, 신혼도 갖고 싶다고요! 너무 일찍 낳긴 싫어요!"
선보고 3개월 만에 결혼하는 아직 서먹한 사이에 딩크족 하자는 소리는 차마 안 나왔다. 용기가 너무나 부족했다.
신혼 기간은 남편의 3개월과 나의 1년에서 절충했다.
약 반년 후 임신에 성공했다.
출산 예정일은 12월 31일이었다.
<운 좋았던 임신기간과 출산>
드라마에서 임신은 "욱~"으로 알아차리더니 나는 아침 눈 뜨면 메슥거리는 것이 다였다. 그래, 생리통으로 그리 고생을 했으니 10개월 무 생리, 이 정도의 축복은 있어야 덜 억울하지! 입덧은 아무거나 좀 먹으면 괜찮아졌다. 4개월 즈음엔 그 마저도 사라지고 엄청난 식욕만 남았다. 임신 기간과 출산의 상세한 과정은 살림과 직접 관련이 없으니 다른 글에 적고자 한다.
임신 기간에 살림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 해치우기. 최소로 하기.
태교는 직장 생활 열심히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딱 하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았는데 저녁 요리교실이었다. 애가 생긴다는데 더 이상 라면만 할 줄 아는 삶은 너무 심하다 싶었다. 다녀보니 수업 후 만든 반찬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한 달인가를 반찬 걱정 없이 뿌듯하게 지냈다. 배운 것은 나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는데 딱 두 가지였다.
김치찌개는 끓은 뒤 중불에 20~30분 이상 끓이기.
깨는 요리 마지막에 넣거나 그릇에 담은 뒤 넣기. 일찍부터 넣으면 냄비에 다 붙고 음식에는 안 남는다고 했다.
몸이 무겁단 느낌이 없어 수업 종 치면 계단을 뛰어다녔다. 선배 선생님들의 걱정도 들었다. 막달이 될 즈음엔 화장실 갈 때마다 배에 대고 "꼭 붙어있다 나와~. 더 있다 내년에 나오면 더 좋고. 생일이 너무 뒤면 어릴 때 너무 작고 친구들 못 따라간다." 태담 아닌 태담을 들려주었다.
애는 협박이 싫었는지 여봐란 듯 3주 일찍 나왔다. 출산 전날도 몸이 가벼워서 상상도 못 했다. 예정보다 많이 빨라서 휴직 처리 등은 남편이 알아서 했다. 고도근시인데 산소 줄을 다느라 안경을 빼버려서 배 위에 얹힌 아이의 정수리가 희미했다. 운 좋게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체중보다 조금 더 나갔다.
정신없던 3일은 금방 지나갔고 얼굴의 터진 실핏줄들은 없어졌다. 병원 퇴원 후 예약했던 산후 조리원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방이 갑자기 무서웠다.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있었다. 도저히 못 있겠다며 집으로 가게 되었고 조리원은 친절하게도 환불해주었다.
봉합 문젠지, 절개 상태의 문젠지 실밥을 빼기 전까지 회음부 절개 부위가 다른 산모들보다 유달리 아팠고 남편은 신생아를 안는 것조차 무서워했다.
어머니는 조리원 입소만 보고 가시려다 졸지에 그 날부터 1개월 가까이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청천벽력이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한 일이었다. 조리원에 입소하고 일단 지내봤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패닉에 빠져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호르몬 문제였을까? 예약하러 가서 밥도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었건만. 조리원 측에도 영업에 피해를 주어 죄송했다.
<애를 낳으면 모성애가 생긴다고?>
어릴 때부터 어린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기들도 그걸 아는지 내게 안기면 곧잘 울었다. 그래도 출산할 때까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주변의 모든 출산 경험자들이 입 모아 말했으니까.
애를 낳자마자 애가 너무 예뻐 보여서 눈물이 났어.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나도 애 싫어했거든? 그런데 내 애는 다르더라!
속.았.다.
엄마가 되면 모성애가 무조건 생긴다며! 뻥쟁이들!
애가 예뻐 보이고, 똥냄새마저 향긋하다고?
모성애는 모두에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자는 아기는 내 애나 남의 애나 천사 같기 마련이건만, 신생아는 자면서도 몸을 비틀고 용을 쓴다. 이뻐 보이기보다는 무서웠다. 하도 이상해 보여서 어머니께 몇 번이나 여쭤봤다.
"갓난애는 원래 이래요? 얘 괜찮은 거예요?"
출산 직후 병원에서 애를 보고 있으면 귀엽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심지어 '그때 분만하는 사람이 나만 있었으니 내 애가 확실하겠네. 이렇게 수시로 얼굴이 바뀌고 큰 특징이 없으면 내 애가 확실한지 어떻게 알지? 발목에 표식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퇴원 후 밥을 소처럼 먹고 젖 먹이고 잤다. 잠이 쏟아졌다. 옛날 할머니들은 애 낳고 바로 밭을 매셨다더니 어떻게 가능하셨지? 정말 죽을힘을 다해 사셨네.
나의 꿀 같은 잠 뒤에 친정어머니의 손이 트는 노고가 있으셨다. 워낙 빨래, 청소 않는 딸과 사위. 신생아가 있으니 매일 아기 욕조에 물 받아 목욕시키고, 삼시세끼 미역국 가득, 사위 밥까지 챙기시고, 잦은 삶는 빨래까지.
키워보니 육아가 영 안 맞아 둘째는 안 낳았지만 낳았다면 무조건 조리원에 갔을 것이다.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보이셨다.
<나도 비위 약해요>
2개월이 넘어가는데도 모성애는 크게 자라지 않았다. 책임감은 꽤 커졌다. 혹시 책임감이 모성애인 것일까?
그 와중에도 내 몸은 아이에게 반응했다. 애가 울면 가슴에 젖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정말 살아있는 보온도시락인데?
기왕이면 큰 도시락이 나았을 텐데 늘 모자랐다. 분유, 젖병, 소독기를 사야 했다. 애가 아무 젖병이나 물지 않아 당시 유행이던 모유실감을 사고서야 젖꼭지 쇼핑이 끝났다. 변비가 문제였다. 역시 몇 번의 시도 끝에 산양유를 먹였다.
애는 "뱃골(먹는 양, 위장)"이 크지 않았다. 2시간마다 먹는 것을 만 두 돌까지 했다. 머리만 대면 잘 잠드는 내가 2시간마다 젖을 물렸고 6개월 뒤 젖이 끊어지고는 남편과 번갈아 수유했다. 기저귀도 서로 번갈아 교체했다. 나는 낮에 쉬는 느낌이 전혀 없었고 내 기준엔 직장이 육아보다 나으니 직장 다녀온 남편도 아빠답게 기저귀 같이 갈고 해야지! 비위가 약했던 남편은 이 일을 피해보려 했으나 나의 의지에 져서 같은 방에서 자야 했다. 점점 능숙한 업무처리를 보여주었다. 나라고 똥 치우기가 좋을 리 있나. 참는 거지.
영아산통에 한밤중 울고 가끔 열까지 나면 그 새벽에 물어볼 곳도 없으니 차를 몰고 응급실로 갔다. 신기하게 차 타고 가는 5분 만에 애는 잠들었고 응급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열은 떨어졌다. 그 일은 3번이 넘게 일어났다. 우린 더 이상 속지 않고 차만 태워 동네 한 바퀴를 돌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