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 잡아먹히기 전에 손절하기
전방 십자인대 파열! 반월상 연골 두 쪽 모두 파열! 약간의 골절과 무릎뼈에 멍! '멍멍멍 이게 무슨 개소리이냐' 하고 생각했다. 무릎 수술을 하고 꼼짝없이 2주를 병원과 집에 갇혀 지냈다. 주말마다 해뜨기 무섭게 산을 오르고, 하산 후 막걸리를 짠! 짠! 짠! 그것도 모자라 벌게진 얼굴이 식기도 전에 클라이밍을 가야 하루를 잘 산 것 같은 슈퍼 집밖순이에게 침대생활 2주는 영원 같았다. 그날의 사고를 요약하자면 '클라이밍을 수업을 듣던 중 동작을 시도하다 손을 놓쳤다' 정도가 되겠다. 시원하게 날아오른 뒤 추락한 나는, 떨어지는 온 무게를 오롯이 무릎으로 받았다. 돌덩이에 무릎이 부딪히는 순간, 내 몸 안에서 '오도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소중한 오른 무릎은 그날 말 그대로 박살 났다. 몸이 불편하니 즐거운 일이라곤 먹는 것뿐이다. 요즘 치킨에는 젤리며, 민트며 굉장히 실험적이다. 무릎이 말짱했으면 친구들 만나서 재미로라도 도전했을 메뉴들인데, '뭐 저런 걸 만들었냐'하고 괜히 아니꼬웠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괴팍해지는 것 같다. 무난하게 비비큐 황금올리브를 시키고서 또 그 자리에 누웠다.
‘오도독’
야무지게 닭다리 연골까지 발라먹는 나인데, 오도독하는 소리에 왠지 내 무릎이 아파져서 먹던 치킨을 내려놨다. 치킨을 받으러 나간 것 말고 움직인 기억이 없었다. 아픈와중에도 먹기는 잘 먹어서 차곡차곡 살만 차오른다. ‘나 치킨 왜 시켰지’를 시작으로 다소 극단적인 자책 타임이 시작됐다.
'치킨을 시킨 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고, 의지가 없는 나는 올해도 한 게 없고, 나는 왜 사냐.....?'
갑갑함이 한계치에 도달한 나는 목발을 짚고 집을 나섰다. 겨우 10미터 걷고 1분 쉬어야 했지만, 차오르는 숨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10분 거리의 코인 노래방을 30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현금을 안 챙겼구나. 엉차엉차 ATM기를 찾아 만 원을 뽑았다. <비와 당신>으로 잔잔히 시작한 두서없는 플레이리스트는 보아의 <No.1>, 자우림의 <오렌지 마멀레이드>로 피크를 찍었다. 사자후를 뿜어내듯 응축된 에너지를 쏟아냈으니 마무리 선곡은 역시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세상 사람들 모두 정답을 알긴 할까
힘든 일은 왜 한 번에 일어날까...(생략)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수고한 거 하나 없는 하루에 과분한 노래 같아 입 밖으로 부르려다 말았다. 가사를 눈으로 곱씹고 나니 왠지 기운이 나서 괜히 더 씩씩하게 집으로 향했다.
다치기 전에는 더 많은것들을 혼자 했었다. 혼밥 정도는 일상이었고 종종 혼술을 하곤 했는데,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날 따뜻한 잔술 한모금은 ‘그럴수도 있지, 괜찮아’ 하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어떤 전시나 영화는 혼자 보는 게 나을 때가 있는 것도 알았다. 잠깐의 머쓱함만 지나가면 생각보다 괜찮은 시간들로 바뀌곤했다. 혼자 놀기는 나랑 친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혼밥, 혼술, 혼코노. '혼'이 들어간 것 중에 못할 것이 없는 나였는데, 이번 사고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 충격적이었다. 집에 혼자 있기가 견디기 너무 힘이 든다. 집에 (대체로 누워) 있게 되자 가뭄이 든 듯 씩씩함이 말라버린걸까. 무엇보다 언제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함이 이놈의 무기력증을 또 불러왔다.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게 외롭기도 했고, 아빠가 살아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자꾸만 하게 돼서 마음이 더 슬펐다. 몸을 제대로 쓸 수 없어져서 마음에 힘이 없는 건지, 그 반대인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무릎은 분명 회복하는데 가만 앉아있는 것도 피곤한건 왜일까.
그랬는데, 닭다리 뼈를 오도독 씹어 먹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슬금슬금 쌓인 익숙한 기운. 이 부정적인 기운은 단칼에 끊어내지 않으면 또 같은 곳으로 나를 끌어내릴 것이다. 마른 마음에 물을 주듯, 조금 힘을 내서 밖으로 나왔다. 이마에 송글 맺힌 땀만큼 마음이 촉촉해진다. 움직이기 힘들어서 목이 말라도 침 삼키며 참았던 날도 있는데, 오늘은 무려 코인 노래방을 다녀왔다. 가만 누워서 안될것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정말 되는게 하나도 없다는 걸 나는 충분히 겪어서 알고있다. 집은 변함없이 고요할 테지만 나는 요란하게 수고로운 하루를 살아야지. 돌아오는 길, 떨어진 낙엽들 사이로 햇살이 반짝거린다.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2주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절뚝절뚝. 목발질이 서툴러 몇 걸음 못 가고 깁스 사이로 삐져나온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아파트 현관에 계단이 이렇게 많은 줄 이제 알았다. 컴컴한 복도 건너편 통로에는 고맙게도 여전히 생그러운 노란색 은행잎이 떨어지고 있다. 언제나 가을이 그러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