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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네 Feb 27. 2022

모든 것은 퀘스총 마-크 [?]

외치자. 인생이 지랄 맞을 때

간만에 대구에 왔다. 오랜만에 왔어도 할 일은 딱히 없어서 동네 친구와 드라이브를 나섰다.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하는데 창밖에 익숙한 요양병원이 보였다. 저기에 할머니가 계신다고 했더니 친구는 망설임 없이 들렀다 가기를 권했다. 불 꺼진 병실에 오독하니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150cm 정도 되는 자그마한 체구에 헐거운 병원복을 입혀놓으니 창문에 아래 실루엣이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거리는데 갑자기 병실이 밝아졌다. 무빙 센서가 작동하지 않을 만큼이나 가만히, 얼마만큼을 저러고 계셨을까. 명절도 아닌데, 게다가 아빠도 없이 방문한 손녀딸을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셨다. 알아는 보시는 건가? 그다지 애틋한 사이는 또 아니었어서 막상 할 말이 없다. 함께 온 넉살 좋은 친구만 두런두런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어린아이 대하듯 나긋나긋 이야기하는 친구를 입술을 삐죽거리시면 흘겨보셨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저 고깝다는 표정은 여전히 여전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저 표정을 지으시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사실 할머니와 몇 안 되는 기억들은 추억이라기보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게 많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내 삶이 흔들릴 때마다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언제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무신 적이 있었다. 조금 심심하셨는지 갑자기 내 귀 청소를 해주신다며 무릎을 팡팡 내리치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할머니의 단호한 기운에 두 주먹을 꽉 쥐고 무릎에 누웠다. 사그락 삭 샤삭. 간지르르한 느낌에 몸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한결 편안지기 시작했다. "이네는 나중에 커서 뭐하고싶노~" 할머니가 물어보셨다.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었는데 순진한 나는 발랄하게 눈에 보이는 건 전부 내 손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침대랑, 책상이랑, 인형이랑, 베개랑...


"하이고 찌랄한다!"


싹둑. 말이 잘렸다. 꿈을 이야기하는 손녀딸에게 지랄이라니. 귀를 파느라 몸은 꼼짝 못 하고 눈동자만 마구 흔들렸다.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삐죽한 그 입술이 그려졌다. 귓구멍을 살피느라 푹 숙인 할머니 얼굴이 내 귓바퀴 바로 위에 있어서 '지랄한다' 네 글자가 콕콕 콕콕하고 뇌에 바로 박히는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 잊고 지내는 기억이다만, 가끔 용기가 필요한 순간 생각나서 자신감을 싹둑 잘라버리고는 했다. 특히 사람들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면접을 볼 때. 찰나의 망설임 사이에 나를 의심하게 하는 말, '찌랄한다'가 튀어나왔다. 그럴 때면 뇌가 쪼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뒤에 정신을 가다듬으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 순간 위축된 마음이 잘 회복되지는 않는다.


그랬던 할머니가 이제는 본인 머릿속 무엇 하나 선명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다음번에 할머니를 찾아뵌 건 명절 때였다. 번잡스레 온 가족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 건네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다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시절이 지금보다 또렷하신지 가끔 질문을 일본어로 하시는데 그때마다 병실은 혼돈의 카오스였다. 다들 할머니의 말을 풀이하느라 각자 이러쿵저러쿵 말이 더 많아졌다. 정신없는 그때 할머니가 검지를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모든 것은! 퀘스총 마-크!"


웅변하듯 단호한 목소리. 왠지 총명한 눈빛. 할머니는 치켜든 검지로 휘리릭 커다란 곡선을 그린 뒤, 야무지게 아랫점까지 찍고서 다시 자리에 누우셨다. 온 가족은 폭소했다. 그래 인생은 퀘스총 마-크. 물음표다. 그래서 알 수없음의 영역에, 불안은 제 멋대로 찾아와서 자꾸만 자신을 꺾어놓는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할머니에게 꿈을 인정받지 못한 일이 마치 세상에게 괄시받았다고 느꼈다. 그때는 '어른 가족' 이 어린이의 온 세상이었으니까. 나이를 조금 먹은 나는, 이 어른들이 속절없이 늙은 한 인간일 뿐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한다. 이들도 딱 본인들 살아본 만큼이 자기 세상 아니겠는가. 그냥 괄괄하게 늙은 한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니 이제 와서 헛웃음이 날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또 내 세상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하면서 살려고 노력 중인데 그 과정이 어린날의 꿈처럼 동화 같지만은 않다. 그래서 불안하고 혼란한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이쪽저쪽 부딪히는 나날 속에 마음에 남은 말들은 셀 수 없이 많아졌다. 하지만 아픈 말만 남는 것도 아니다. 아픈 말 위에 새로운 세상이 자란다.


P.s 할머니, 어쩌면 할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라니까 지랄 맞네요. 하지만 인생은 '퀘스총 마-크'의 연속이고 지랄도 할라니까 아직은 능력이 부족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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