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밑줄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의 저 한마디가 예술의 본질을 얼마나 부족함 없이 담고 있는지, 무언가를 창작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 같다. 그림 그리는 일을 왜 기술이라고 하지 않고 예술이라고 하는지도. 나는 미술가나 뮤지션 같은 예술가는 아니지만 글을 창작하는 동안 ‘어린아이처럼’ 쓰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져감을 느낀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이 말이 어찌나 듣기 좋던지. 그런 때가 있었다. 글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탁월해지고 싶었고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지 고민하며 근사한 문장들을 쌓아 갔다. 그걸 누가 알아봐 주고 글 참 잘 쓴다고 말해 주면 종일을 충만함에 젖어 보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글 잘 쓴다는 소리가 기쁘지 않다. 이제는 글쓰기 기술과 능력으로 사랑받기보다는 내가 묻어난 글로, 나란 사람 자체로 사랑받고 싶다. ‘글’과 함께 ‘글쓴이’로서도 읽는 이에게 다가가고 싶어진 거다.
내가 더 많이 담기는 글을 쓰는 것. 글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나를 보여 주는 것. 남들의 시선과 뒤섞인 무언가가 아니라 단지 내 눈으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담아 내는 것.
예전에는 글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이제 글이란 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나란 사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처럼 여겨진다. 만약 내게 작곡 능력이 있었다면 글 대신 노래를 만들었을 거고 그림에 소질을 타고났다면 그림으로 나를 표현했을 거다. 꼭 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사람들에게서 “글 잘 썼네, 글 좋네”로 끝나는 평가가 아니라 “이 글을 쓴 사람이 궁금해”, “이 글을 쓴 사람이 왠지 좋아”, “이 사람의 다른 글도 보고 싶어”란 말을 듣고 싶다.
글 속에 나를 최대한 수수하게 담아 내는 것. 화장을 지우고 아이 얼굴처럼 되는 것. 요즘 원하는 건 이런 거다. 솔직하고 본능적으로, 자의식도 뽐냄도 없이 내가 느끼고 생각한 걸 표현하는 어린이를 닮고 싶다. 내 글이 어떤 쓸모를 가질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를 너무 고민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이 어떤 비난을 받지는 않을지 걱정하기보단, 이 글이 너무 전형적이거나 관습에 얽매여 있지 않은가를 염려하고 싶다. 검열 없이 무언가를 표현하는 용기를 갖기를.
- 손화신의 책 <아이라는 근사한 태도로>(웨일북) 중에서 -
매거진 <책 표지와 밑줄친 문장들>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문장들을 모으고, 표지 한 장 그려 같이 껴넣는 개인 수납공간입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누가 보면 배곯고 다닌 사람처럼 만나는 족족 책을 해치우고 있거든요. 제 마음을 요동치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수신되기를 바라면서 칸칸이 모아놓을 예정입니다.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만 골라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예쁜 표지를 만나면 표지가 예뻐서 올리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1회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