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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심 Apr 06. 2020

아이는 됐고 남편과 고양이면 충분합니다

여덟번째 밑줄


내가 운이 아주아주 좋아 여든까지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래서 그 인생을 사계절로 나눠본다면 지금이 딱 여름이 끝나는 시점이다. 내 인생의 여름이 끝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는지 지금까지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렸던 여름이 그래서 좋았나 보다. 가을을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다. 지나간 여름을 그리워하는 사이에 가을이 깊어졌다. 바싹 말라버린 나뭇잎이 나무 아래 수북이 쌓였다. 벚나무였다. 봄에는 연분홍 꽃을 꿈처럼 피워내고 여름에는 보라색 열매를 한가득 맺었던 아름다운 나무는 어느새 노랑과 갈색의 이파리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나중에 아이 없는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꽤 여러 번 들었던 말 앞에서 나는 진짜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맞을 아이 없는 겨울이 두려웠다. 추운 겨울 굽은 등으로 혼자 걷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 말이 피할 수 없는 저주처럼 느껴졌다. 가을 너머에는 겨울이 있다. 그래서 가을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땅만 바라보며 걷다가 고개를 들었다. 초록의 절정은 끝났지만 군데군데 산수유나무 사이로 빨간색 열매가 달려 있다. 모과가 덜렁거린다. 나뭇잎이 떨어지니 무성한 이파리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가지가 드러난다. 나무들이 빨강, 노랑, 분홍, 자주 온갖 가을색으로 물들었다. 가을의 숲은 여름과는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을이 아름다웠다.


인생의 끝에서 자식을 갖지 않는 걸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도 잠자코 웃기만 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이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의 저주는 반사하겠어요.”


인생의 끝에서 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아이의 유무에 따라 흔들리는 삶이 아니다. 내 안의 진실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지, 매일을 얼마나 충실하게 보냈는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주 웃고 계절을 온전히 느끼고 내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이 가을 너머에 있을 추운 겨울이 궁금해졌다. 혼자 있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아주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말 테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도 마음 안에는 초록빛 새싹과 알록달록한 작은 꽃이 가득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가을의 숲에서 다짐했다.
‘점점 드러나는 마른 가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쌩하고 불어도 쓸쓸해하지 않을 거야. 온몸에 담아둔 지난 봄과 여름의 기억으로 귀엽고 작은 열매를 맺을 거야. 이윽고 겨울이 와 숲이 하얗게 눈으로 덮이고 한밤처럼 고요해지더라도 몇 장의 낙엽, 몇 알의 열매, 지난 계절이 나에게 준 선물을 손에 꼭 쥐고 숲을 걸을 거야.’
나는 지금 나의 가을을 맞을 준비가 됐다.  


- 진고로호의 책 <아이는 됐고 남편과 고양이면 충분합니다>(꼼지락) 중에서 -


매거진 <책 표지와 밑줄친 문장들>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친 문장들을 모으고, 표지 한 장 그려 같이 껴넣는 개인 수납공간입니다. 요새 시간이 많아서 누가 보면 배곯고 다닌 사람처럼 만나는 족족 책을 해치우고 있거든요. 제 마음을 요동치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도 수신되기를 바라면서 칸칸이 모아놓을 예정입니다.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그럴싸한 문장만 골라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예쁜 표지를 만나면 표지가 예뻐서 올리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1회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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