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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심 Jun 04. 2020

퇴사하고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

여자는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


나는 왜 회사를 그만둬야 했을까 자문한 적이 있다. 답은 비교적 명백했다. 이렇게 더 버티다가는 내가 망가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강이 말도 못 했다. 머리는 무겁고, 가슴은 답답하고, 때때로 이명이 들렸다. 주말 내리 잠을 자면 그나마 체력이 올라왔는데, 그래 봤자 배터리 3%에서 40%로 채워지는 수준이었다. 옛날에는 정신력으로 살아내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느꼈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바보야, 문제는 체력이야! 여자는 체력이라고!!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네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 드라마 <미생> 중에서 -


나는 이직처 없이 회사를 나왔다. 조직생활에서 오는 피로감을 견디지 못해 경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막연하게 다음에 들어가는 회사는 오래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지만, 조금 대책이 없었다. 새로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정말 이번에는 오래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또라이는 어디에나 있고, 회사는 하나 같이 그지 같으니까. 그러니 내가 변해야 했다. 안 힘들 수는 없으니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야 했다.

운동을 알아봤다. 백수다 보니 운동에 돈 쓰는 게 여간 아깝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김에 제대로 운동해보려고 개인 지도를 받아볼라 치면 돈 100은 들여야 했다. 백수 주제에 감히? 나는 산책로에 앉아 애꿎은 초록창을 쳐다봤다. 내 앞을 쌩 지나는 러닝하는 처자를 쳐다봤다. 탄탄하고 곧고 가벼운 모습. 나도 저렇게   있을까? 달리기가 내 마음속에 홀연히 내달려왔다.     

나는 달리기를 정말 싫어하는 학생이었다. 오래 달리기는 잼병이었다. 뛰기 싫어서 아예 걸음을 늦추는 대쪽 같은 삶을 살아왔다. 그런 내가 달리기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 뛰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남편이 함께 뛰어 주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200미터 운동장 1바퀴도 뛰지 못해 걷다 뛰다를 반복했고, 이에 남편은 5킬로 30분을 달성하면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후후)

인센티브에 힘입어 매일매일 거리를 늘려나갔다. 하루에 500미터씩 점진적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사실 3킬로가 될 때까지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뭔가 하고 있다는 심리적 위안 정도? 였다. 운동장이 지겨워서 집 근처에 있는 하천으로 나갔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구경하면서 앞에 보이는 저 다리까지만 가보자 하다 보니 너무 멀리 온 기분이 들었다. 남편에게 물었다. - 여보 우리 얼만큼 뛰었어? - 쩌 앞까지는 찍고 와야 3킬로야. 그렇게 처음으로 4킬로를 돌파했다. 남편의 구라는 수준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가 생겼다. 일주일에 두세 번 그 길을 따라 뛰었다. 쉬지 않고 4킬로 30분을 완주하면,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진자운동을 계속했다. 이어 빅 트림이 시원하게 나왔다. 이제껏 얹혀 있던 무언가가 씻겨 내려간 그 기분은 개비스콘 저리가라였다. 뛴 날은 잠도 잘 왔다. 회사 안 가지 사회적 거리 두지 에너지 소모는 안되고 잡생각은 많아 잠 못자는 괴로운 밤에서 비로소 탈출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꾸준히 달리기를 하니 바디 셰이프(Body shape)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뱃살이 빠지고, 엉덩이가 탄탄해지고, 다리가 매끈해졌다. 아마 나만 느끼는 미미한 변화였다. 그래도.. 그래도.. 거나하게 좋았다. 체력은 좋아졌을 거라 짐작만 했다. 당장 야근하는 게 아니라서 비교가 어려웠다. 다만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내가 또다시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 됐을  똑같이  견디게 힘들면 어쩌지 고민했는데, 스스로 회복하는 법을 알아낸 것 같아 든든해졌다.

매번 귀찮아 죽겠지만, 습관처럼 달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탄탄해지기를(마음도 몸이니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금처럼 가슴 쫙 펴고 두 팔을 휘저으며 앞 발치를 내딛을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달리고 있다. 체력이 갖춰지면 나도 승부를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회사 안이든 회사 밖이든 뭐든 온 힘을 다해 내 길을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일단 종이 인간부터 벗어나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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