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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못해 식어가는 칼국수 위에 내려앉은 오후의 예감

이름도 묻지 못한 남자가 남기고 간 황금빛 기척에 대하여

by stephanette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어떤 날은 마치 유리창을 두드리는 비의 손가락처럼, 혹은 예고 없이 다가와 초인종을 누르는 초대받지 않은 운명의 사절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일상의 리듬 위로 불쑥 도착한다. 그날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채, 나는 연한 아이보리 빛으로 탈색된 세탁기에, 끝단이 풀려 실밥이 일어난 채로도 어쩐지 여전히 정갈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오래된 흰 수건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넣었다. 둥그런 크롬의 버튼을 눌러 기능을 확인한 후, '시작'이라는 낱말이 음소거된 확신처럼 다가오는 순간에 버튼을 눌렀고, 그 순간 세탁물들은 어지럽게 흩어졌던 기억처럼 질서정연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생의 목적도, 감정도 잃은 망령처럼, 혹은 기억의 빈집에서 조용히 밀려나온 유령처럼, 말없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레트로 감성의 초록빛 플라스틱 키홀더는 햇살이 없는 도로의 적막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평일 오후의 동막해수욕장은 마치 오래된 사진의 채도만을 지운 필름처럼, 흐릿하고 무채색의 풍경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은 방향을 잃은 연기처럼 허공을 휘돌았고, 바닷가 칼국수집의 간판은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처럼 중심을 잃고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나는 기억의 파편처럼 깨어 있는 오래된 영상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곳은, 아주 오래 전, 아버지와 함께 앉아 해산물을 골라 작은 접시에 건네받던 자리였다. 그 기억은 음소거된 채, 상영 중인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곳곳에 검은 점이 튀며 재생되었고, 나는 그 장면을 어릴 적 과학실에서 본 포르말린 속 붕어나 닭의 사체처럼—빛도 온기도 없이 박제된 감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늘 그랬듯,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 끝 구석, 낡고 바랜 하늘색 원목 창틀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자리는 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등지고 조용히 앉아 있는 법이며, 그날 나의 자리는 우아한 몰락을 감내한 귀족 여성의 침묵과도 같은 품위를 띠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켜켜이 스며들며 맺힌 소금 결정들이, 마치 세상의 모든 눈물이 굳어 투명한 결정을 이룬 듯 반짝였고, 그 조각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굳어져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산란했다. 나는 그 반짝임을 응시하며, 그 너머에서 비틀리고 부서지는 바다의 포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바다는 내 기억보다 훨씬 덜 푸르렀고, 갓 빨아 널지 못한 이불처럼 은근한 불안감을 품은 채, 내 고독보다 더 침착하고 조용했다.

“저... 저기요, 여기 해물 넣은 칼국수 일인분 되나요? 전, 그걸로 주세요.”

그 말은 마치 바닷바람과 섞여 비릿한 습기가 감도는 허공 속으로 살며시 던져졌고, 곧 사라졌다. 나는 매년처럼, 아무런 계획도 없이 흘러오다시피 그곳에 도착했기에, 익숙한 메뉴를 다시 고를 필요조차 없었다. 그곳의 직원은 나를 한 명의 고객이 아닌, 매해 정해진 시기에 당연히 돌아오는 일정한 시간의 일부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때 그가—들어왔다.

낡은 하늘색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문이 삐그덕하고 열리는 소리는 마치 오랜 시간 닫혀 있던 극장의 막이 드디어 올려지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걸음. 단 하나의 발자국만으로, 그 사내는 공간의 공기를 바꾸었다. 바다의 해풍과 철제 구조물의 후끈한 공기가 섞여 만들어낸 묘한 습열은 그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낮아졌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실내 온도는 무너져 내렸다. 시간은 어미새가 새끼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둥지를 돌아보는 것처럼 미련을 품은 채 자꾸 뒤를 돌아보았고,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스스로를 어둠 속에 묻고 있었다.

유리창에 맺힌 빛의 결정 너머로 바다의 흰 포말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조차도 끝나버린 연극의 세트를 이동시키듯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리톤의 굵직한 음성은 숨을 조이는 듯 낮고 묵직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고, 그 음성은 마치 먼지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오래된 바이올린처럼 단 하나의 음을, 그러나 영원히 각인될 하나의 음을 뿜어냈다. 그 사내의 음성은 내 청각 가장 깊은 곳에 닿아 척추를 타고 흘렀고, 무릎 아래 발끝에서 식은땀이 피어오르듯 스며나왔다. 내 몸은 그 순간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 감각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장미꽃잎을 흩뿌려 둔 반신욕조에 뜨거운 온수를 넘치도록 채워놓고 그 안에 잠긴 것 같은, 도취된 열망의 상태였다.

그는 주저함도 없이, 저렴한 MDF 시트지로 마감된 작은 식탁 사이를 지나, 오래된 철제 의자 앞에서 멈추었다. 휘어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걸음. 그의 발걸음은 세상의 모든 가능성 중 단 하나를 알고 있다는 듯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는 척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의 발을 바라보았다. 진홍빛이 섞인 갈색의 보트슈즈, 짙은 남색에 가까운 검정 끈은 단정히 매어 있었고, 가죽의 표면에는 마른 강물처럼 얇게 깔린 흙빛 먼지가 시간의 풍화처럼 눌려 있었다. 그 낡음은 게으름의 흔적이 아니라, 긴 여정을 견디며 얻은 고유의 품격이었다. 그 끈은 마치 과거의 인연을 묶고 있는 오랜 계약처럼 단단하게 조여 있었다.

그가 말을 건넸다. 정확한 단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내가 놓아두었던 상아빛의 플라스틱 빈 접시—자잘한 직선 스크래치들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그 표면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존재는 분명했다. 나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먼저 그의 기척이 나를 바라보았고, 내 시선은 천천히, 마치 정해진 길처럼 그의 얼굴을 따라 올라갔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비스듬히 들어온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엔,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낯설고도 명확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 만난 적도 없는데도, 그의 기억 어딘가엔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울림이 있는 낮은 목소리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 음성의 감도와 아름다움에 묻혀, 그 내용은 소리 너머로 흘러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 이름을 묻지 않았고, 나 역시 그의 이름을 묻고 싶지 않았다. 이름이란, 삶이 던지는 가장 가벼운 포장지이며 동시에 가장 허망한 명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유리창 너머 햇빛이 점점 기울고 바다의 포말이 멀어지는 그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구석진 자리에 나란히 앉기로 약속한 사람들처럼. 아니 어쩌면, 이 모든 만남이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쓰여진 소설의 한 문장처럼—숙명처럼—이미 예정된 일이었던 것처럼.

사랑이란 어쩌면, 커다란 대접에 가득 담긴 조개와 국물, 그 모든 푸짐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식어가는 칼국수처럼—지나간 뒤에도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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