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당신 소유의 아파트로 다시 들어가 살기로 결정한 후 우리는 리모델링을 하기로 했다. 당신 소유의 집을 두고도 무려 10여 년 동안 이사를 다닌 이유는 조카들의 유학생활을 위해서였다. 두 명의 손녀딸들이 각각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엄마는 밥이며 빨래며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래서 2년에 한 번씩 전셋집을 전전하며 손녀딸들의 학교 근처로 이사를 다닌 것이다. 이건 맹외조모 삼천지교가 따로 없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정작 우리 집은 남의 손을 탔다. 그러니 이 리모델링은 단순한 리모델링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쌓인 타인의 흔적을 씻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묻혀 있던 과거를 함께 털어내는 마치 의식 같은 리모델링이었다.
엄마 집을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하고 인테리어 업체를 섭외하여 계약을 하고 온 날. 엄마는 나직이 속삭였다.
"아. 설렌다"
낯설었다. 어쩌면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이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그 이유는 살면서 엄마가 감정표현을 하는 일이 지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4남매를 홀로 키우면서도 단 한번 힘들다고 하시는 걸 들어본 기억이 없다. 엄마에게 왜 힘든 시절이 없었겠나.
언젠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옛날 얘기를 안 해?"
"엄마 그때 안 힘들었어?"
그럴 때마다 엄마는 뭐 그런 싱거운 질문을 하냐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었다.
"그냥 살 궁리 하느라고 바빴지..."
'살 궁리'.
그러고 보니 엄마가 살 궁리에 매진하는 동안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 엄마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했는데, 지는 쪽은 번번이 나였다. 잔뜩 심통이 난 나에게 엄마는 대신 이모를 보내겠다는 말로 달래 주곤 했다. 그 바람에 나의 졸업식 사진에는 엄마가 아닌 이모가 찍혀 있다.
엄마라고 왜 힘이 들지 않았겠나. 힘들다는 말이야 말로 기댈 사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던가.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에만 허락된 말. 근데 그 시절 엄마에겐 그 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토해낼 수도 없는 말을 꾹꾹 눌러 참았겠지. 꾹꾹 눌러 참다 보니 어느새 잊힌 말이 되었을 테고 말이다.
'힘들다' 한마디에 무너질 듯 두려웠겠지. 그러다 어느새 그 단어가 사라져 버려서 그 감정도 따라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2주간에 걸친 리모델링이 끝나고 새로 단장한 집으로 들어가는 날.
엄마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신난다. 신나!"
마치 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신이 난 엄마를 보면서 다짐했다.
'엄마의 잊힌 말들을 이제라도 하나씩 하나씩 찾아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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