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심산책자 Oct 28. 2022

명화 언니의 실체

추석 연휴 첫날, 엄마와 둘이서 산책을 나섰다.

산책길은 아파트에서 근처 호수공원까지 이어지는 왕복 한 시간 남짓의 아주 호젓한 길이다. 아파트에서 산책로로 이어지는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얘. 큰길 보건소 앞 신호등에서 대기를 하고 있으면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자꾸 명화 언니, 명화 언니 해”
 
 

가끔 앞뒤 맥락 없이 이야기를 꺼내는 엄마이기에 차근히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 누가 엄마를 명화 언니라고 불렀단 얘기야?”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사람 소리가 아니라 신호 대기 중에 나는 기계음이라고 말해 주었다. 건널목 근처로 가면 기계음이 나오고, 뒤로 물러 나면 기계음이 사라지는데 '명화 언니'라고 하는 소리 같았단다. 그제야 나는 신호 대기 중에 보행자에게 위험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입으로 ‘명화 언니, 명화 언니’를 빠르게 발음해 보았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알게 된 '명화 언니'의 실체는 엉뚱하게도 ‘위험하오니’였다. 신호 대기 중에 행인이 차도로 진입하려고 할 때 나는 바로 그 소리. 원래 '위험하오니 한 발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나와야 하는데, 무슨 문제인지 '위험하오니, 위험하오니'만 반복적으로 나왔고 그게 마치 '명화 언니'로 들렸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자 그게 그런 거였냐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나중에 보건소 앞을 지나면 꼭 한 번 확인해 보라며 거듭 당부를 잊지 않는 엄마였다. 


“엄마! 근데 친구분들 중에서 그걸 알아들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 명화 언니로 들었다니까.”

고장 난 기계음이 갑자기 사람이름으로 둔갑한 일명 ‘명화 언니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엄마의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어떻게 전달할까 하다가 퀴즈를 내보기로 했다. 게임은 자고로 상금이 있어야 제 맛. 엄마표 상금까지 걸었다. 언니네 가족들이 오기를 이렇게 애타게 기다린 적이 없었다. 큰언니네 4명, 둘째 언니네 4명까지 모이면 총 8명이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거였다.


엄마와 나는 역할을 나눴다. 나는 사회를 보고, 엄마는 문제를 출제했다. 이렇게 초롱초롱해도 되나 싶을 만큼 모두가 집중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신이 나서 퀴즈를 냈다. 모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쫄깃한 긴장감에 휩싸였을 때 첫 구호가 터져 나왔다. 
 행운의 주인공은 바로 초등학교 5학년 조카였다.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위험하오니’라고 외쳤다.


상금으로 내 걸었던 만원을 넘겨받고 신이 난 막내 조카가 제 엄마에게 날린 촌철살인 한마디가 그날의 우리 가족 풍경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엄마! 외할머니네 식구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잘 웃어서 너무 좋아!”


 노년에 접어든 엄마는 가끔 말귀를 잘못 알아듣거나, 지명이나 사물 이름을 엉뚱하게 바꾸는 바람에 자식들을 웃게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는 익숙했던 말들이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되어가고, 새로운 것들은 또 그것대로 낯설게 느껴지는 엄마를 마주하게 되는 일이 자주 찾아온다. 엄마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불편함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그런 엄마 덕에 명절 풍경이 이리도 즐거운 것을 보면, 어쩌면 엄마의 나이 듦이 당신에게 또 자식들에게도 유쾌한 적응기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이전 03화 사이판의 모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