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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04. 2023

돌겠다, 자꾸 비교해서

그래서 걔는 몇 점 맞았대니?

우리 집 김 여사는 꼭 물어봤다. 내 그래도 공부는 꽤 해서 100점도 맞고, '수'로 도배한 성적표도 받았는데 그녀는 나와 라이벌인 아이, 나보다 잘하는 아이의 성적을 늘 더 알려했다. 어릴 땐 그녀의 질문이 불편하지 않았다. 엄마들은 다 그런 거 아닌가. 나도 그 아이들 점수가 내 것보다 궁금했다. 언젠가는 비교 불가한 최고 점수를 받아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엄마의 관심이 버거워졌다. ‘걔네들’은 성인이 됐음에도 변함없이 꼬맹이 모습으로 박제돼 내 앞에 자주 등장했다. "00네 아들 알지? 미국에서 교수 됐다더라. 너랑 같이 공부했던 **는 한의대를 다시 들어갔다지?" 마흔 넘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이 김 여사에겐 여전히 교복 입은 학생으로 보이는 걸까. 엄마는 나와 친구들이 전교 석차 그대로 의사, 판사, 교수라는 직업을 갖고 그에 합당한 부와 명예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가끔 만날 때마다 그와 그녀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꼬리가 길게 흐려지는 그녀의 말 끝에 이런 류의 아쉬움이 끈적하게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너도 조금 더 할 걸 그랬어. 그치? 회사 그만두고 매가리 없이 집에 있을 게 아니라..."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내 앞에는 항상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앞서려면 반드시 그들을 뒤로 넘겨야 했다. 적어도 이제껏 자라온 세상에선 그러했다. 머릿속엔 일렬종대로 늘어선 인간 행렬이 단단히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무리에 있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리면 불편했다. 타인이 잘한다는 건 '난 그들보다 못났다, 내 앞에 그들이 있다'는 소리로 자동 해석됐다. 회사를 그만두고 1인 기업, 프리랜서, 프리워커 이름을 달고 나니 더 괴로웠다. 자가 동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는 일. 오직 내가 갈 길에 집중해서 한 눈 팔지 않고 정진하면 되는데 주변에 자꾸 눈이 돌아갔다. 


온라인 세상의 그들은 24시간 반짝거리는 무대의상을 입고 종횡무진 뛰었다. 절대평가라곤 받아본 적 없던 나의 자그마한 자아는 더 작아졌다. 자존감이 흔들렸다. 뼛속까지 스며든 비교의식이 열등감을 부르고 시기, 질투, 비판, 판단으로 형태를 바꿨다. 남들이 잘한다고 내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제로섬 게임도 아니거늘. 타인과 상관없이 오직 내 갈 길을, 내 방식대로, 내 속도에 맞게 가면 되는 것을. 인생의 진리는 이토록 단순한데, 그들은 나와 결코 상관없는데 왜 자꾸 눈에 밝히는지. 아, 돌겠다, 진짜. 


내재된 질투는 글 앞에서 제대로 존재를 드러낸다. 도대체 글 잘 쓰는 사람은 왜 이리 많은 건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엉덩이 근육이 사라지도록 의자와 한 몸이 돼서 쏟아낸 글이건만 초라하고 부끄럽다. '그 사람 참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으면 귀가 쑥 커진다. 유명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글을 잘 쓴다'라는 칭찬은 나를 위한 것이었으면 싶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좋은 상황에 있을 때 미워하는 마음은 작가가 되면 반드시 겪는 직업병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쓰기의 감각>을 쓴 앤 라모트가 그리 말했다. 질투는 "가장 품위가 떨어지는 병증"이라고. "그 문제를 쉽게 만들거나 변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첫째 더 나이가 들거나, 둘째 그 흥분이 사라질 때까지 수다를 떨고 다니거나, 셋째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


자신의 찌질함까지 글쓰기 소재로 승화시키는 건 질투와의 전쟁에서 뒤끝없이 승리하는 길이다. 상담 심리학에 따르면, 질투는 비록 고통스럽기는 해도 대상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긍정적인 관심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기제다. 좋은 것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파괴하려는 '시기심'보다 건설적이다. 돌아보면, 나를 '브런치 작가'로 만든 것도 바로 질투심이었다. 브런치 작가라는 것을 대단한 이력으로 내세우는 누군가가 아니꼬워서 작가 소개를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 강의 정도는 그들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끄적끄적 뚝딱거리며 만들었다. 다만, 질투심은 초반 강력하지만 지속력이 약한 게 흠이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면, 이 정도면 됐다는 자기만족이 밀려들면 꾸준히 하려는 의지도 느슨해진다. 


문득, 김 여사가 자꾸 엄친딸을 들이민 게 내 질투심을 자극하려는 큰 뜻이었을까 의아해진다. 조금만 자극을 주면 파르르 불꽃 튀는 열의를 보이는 걸 알고 그랬던 건가. 아무리 그래도 비교의식은 괴롭다. 타인이 지펴주는 의지로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기엔 역부족이다. 질투가 나의 힘이었을지언정 이젠 자유로워질 때도 됐다.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는 '불혹'도 지났다. 김 여사님, 이제 뉘 집 딸 이야기는 안 하셔도 되어요. 혼자서도 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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