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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21. 2024

여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우리의 평화협정

"우리 바닷가 좀 걸을까?"

지척이 푸른 바다입니다. 속초까지 왔는데 바닷물에 발은 한 번 담그고 가야죠. "그래요, 엄마." 대답은 첫째만 합니다. 몸을 움직여 나서는 것도 첫째입니다. 둘째는 숙제를 해야 한다고 안 간답니다. "여행 와서 무슨 숙제야?" "오늘 할 것 밀리면 내일 두 배로 해야 해요. 집에 가서 힘들어져요. "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에 머무는 게 여행이라 해도 우린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중3이 이를 벌써 알고 있다니요. 하지만 이건 왠지 핑계일 것만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만사 귀찮은 사춘기 청소년이 꼬리처럼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리고 전 발이 젖어 모래 붙는 거 딱 질색이에요."


속초로 오던 길, 큰아이는 조수석에 앉았습니다. 운전하는 엄마에게 물병도 따주고, 간식도 건넵니다. "엄마, 오늘 선곡은 제가 해도 될까요? 제가 듣고 싶은 노래가 있는데요. 엄마 듣기도 괜찮을 거예요." 아이는 ‘아이유’를 검색한 후, 모든 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습니다.  "아이유는 가사를 참 잘 써요.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다른 가수들과는 달라요."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아이의 표정이 잔잔합니다. 둘째는 이미 뒷자리에서 잠들었네요. 엄마와 기싸움하느라, 엄마 눈치 보느라 요 며칠간 힘들었을 거예요. 물론 머리는 풀어헤치고요. 시트에 머리가 닿으면 불편하다는 게 합법적이며 공식적인 아이의 ‘산발’ 이유입니다. 차에선 자야죠.


홍천강을 지나 사뭇 높아진 산등성이 사이로 안개가 희뿌옇습니다. 큰아이가 슬쩍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제 엄마가 외출했을 때 사실 공부만 하지 않았어요. 너무 하기 싫어서 침대에 누웠는데 그러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은 거예요. 몸은 침대에 붙이고, 머리로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라고 생각했어요." 가만히 들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그럼 안 되지, 그래도 일어나서 했어야지'라고 제가 응수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날은 참았습니다. 큰아이는 엄마를 잘 알아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명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건 잔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 거예요. 게다가 우리에겐 '사건'이 있었잖아요. 며칠 새 엄마는 착해졌어요. 아직은 약발이 살아있단 말이죠. 아이 말을 댕강 자르지 않고 입을 꾹 닫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죠. 우리 아들, 어떤 마음일까. "그랬구나. 엄마도 그럴 때 있어. 머리랑 몸이 따로 놀 때. 그래도 넌 스스로 '이러면 안 되는데' 라며 네 행동을 돌아봤잖? 이미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는 거지. 이렇게 엄마한테 솔직 말해주기도 하고. 고마워, 아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잖아요. 의견이 부딪혀 뚝딱거리고 마음 상하는 일이 결코 유쾌하지 않지만 마냥 나쁜 것도 아니었어요. 깊숙이 감춰진 속내가 수면으로 드러난 계기였던 셈이죠. 가족이라고 모든 걸 다 알진 못하잖아요. 엄마의 속상한 마음을 이제야 깨달았던지 둘째의 불평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어요. 방학 내내 강도 10만큼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면 속초에서만큼은 6으로 수위를 낮췄달까요. 물론 갯배 탈 때는 이걸 꼭 타야 하냐, 그냥 시장 바로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안 되냐, 산책할 땐, 어디까지 걷냐, 이렇게 더운데 꼭 해변을 걸어야겠냐, 라며 투덜거렸지만 그 끝이 길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뒤통수를 바닥에 대고 자야 할 때를 제외하곤 기나긴 머리를 질끈 잘 묶고 다녔습니다. 큰아이는 평소와 달리 엄마의 마음을 읽고 싶었는지 자꾸 물었어요. "엄마, 바다 한 번 더 안 가도 돼요? 엄마 가고 싶은 카페가 있었잖아요. 집에 가기 전에 거기 들렀다 갈까요?" 우리 셋은 서로의 눈빛을 읽고 표정을 헤아리며 말투를 둥글둥글 곱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여행을 원했던 건 기억을 공유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 멀리, 호화로운 곳에 가봤다는 영웅담 같은 자랑 말고요. 일상에서 소소하게 만나는 순간에 여행의 추억을 오버랩하고 싶었어요. "얘들아, 예전에 속초 갔을 때, 우리 오징어난전 보고 싶어서 빙빙 돌았던 거 기억해?" "엄마, 우리 홍게만 먹고도 배불렀잖아요." "그때 손에 비린내 엄청 났어. 젓갈집에서 형 칭찬도 들었잖아." 나중에 커서 부모 품을 떠나 홀로 살 때, 행여 외롭고 힘든 시간을 지날 때, 우리가 여행에서 함께 누린 시간을 기억하고 힘을 내기를 바랐죠.


열심히 일하는 남편에게 우리 수시로 인증샷을 날리며 안부를 전했습니다. "다들 표정이 좋네. 그런데, 여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거 들었어?" 하고 싶은 말? 금시초문입니다. 큰아이가 공부하기 싫어 딴짓했던 고백을 말하는 걸까요? 둘째가 얼굴을 부비며 사랑한다고 말했던 걸까요? 아이들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 아, 촌스럽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제가 들은 게 맞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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