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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14. 2024

젓갈집엔 '할머니'가 꼭 있어야 해요

아이들에겐 낯선 이들이 천사여서

3년 전 속초 여행을 기억하는 끝자락에는 '젓갈'이 있었어요. 속초중앙시장에서 산 젓갈을 맛있게 먹었던 아이들은 이번에도 꼭 젓갈을 사가자고 했죠. 문제는 젓갈골목 많은 가게 중에 어떤 곳이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주 오가는 곳이면 근처만 가도 몸이 기억할 텐데 3년 만에 찾은 곳은 낯설었습니다. '그' 젓갈집을  특징지을 어떤 것도 뇌리에 남아 있지 않았죠. 그때 큰아이가 툭 던졌어요. "'할머니'요. 간판에 '할머니'가 들어갔어요."

    

큰아이의 말만 믿고 시장 탐방을 나섰습니다. 술빵, 닭강정, 오징어순대 파는 상인들과 사려는 손님들로 시장은 북적입니다. 젓갈 골목을 어찌어찌 찾은 우리는 큰아이를 앞장 세웠어요. "골목 끝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아, 여기예요!" 아이가 멈춰 선 곳엔 정말이지 '할머니'라는 단어가 간판에 큼직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평소 큰아이는 무덤덤하다 못해 디테일에 약해 사람 이름, 가게 이름, 지역 이름 교묘하게 바꿔 부르기 일쑤였는데 웬일인가요. 놀라운 기억력이 어찌나 고맙던지요. 아이가 아니었다면 더운 여름, 시장 안에서 땀 꽤나 흘렸을 거예요.

    

빨갛게 양념된 젓갈이 일렬로 자태를 드러냅니다. 이제부터 선택의 시간. 아무리 젓갈을 좋아해도 다  순 없어요. 아이들과 남편의 취향에 따라 하나씩 고르기로 합니다. 청어알젓, 가리비젓, 그리고 오징어젓이 분홍색 통 안에 꾹꾹 눌러 담깁니다. 그사이 놀면 뭐 합니까? 우리의 젓갈을 맡은 아저씨에게 말을 건넵니다. "저희 애들이 몇 해 전 여기서 산 젓갈이 맛있다해서 다시 왔어요." 제가 이렇게 스몰토크를 시작하면 우리 아이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칩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엄마가 갑자기 가게 사장님들한테 친근함을 표하며 대화하면 오글거린다나요? 알게 뭐예요. 열심히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물건이 좋아서 다시 찾아왔다'는 말처럼 기분 좋은 게 어딨겠어요. 속초의 추억을 선사했으니 우리에게도 고마운 분들인 걸요.


"가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는데 저기 서 있는 큰애가 '할머니'가 상호에 들어간다고 하더라구요. 설마 했는데 진짜 그렇네요." 저울에 무게를 달아가며 젓갈을 담던 아저씨의 손이 멈춥니다. "진짜요? '할머니'를 기억하다니. 아, 감동이다." 곁에서 듣던 아주머니도 손뼉을 치네요. "세상에, 그때가 언제래요? 학생이 몇 살일 때래요?" 멀찍이 떨어져 있던 큰아이를 소환합니다. "3년 전이요. 중학생 때였어요. 지금은 고등학생이에요." 함박웃음을 짓던 아주머니가 작은 젓갈통을 하나 꺼내더니 명태회를 척척 담습니다. 아이가 맛보던 시식용 아귀포도 한주먹 크게 쥐어 비닐봉지 안에 넣습니다. "학생, 힘들겠지만 공부 열심히 해요. 조금만 지나면 돼요." 짭짤한 해산물을 사랑하는 큰아이의 입이 헤벌쭉 벌어집니다. 아저씨가 건넨 젓갈통도 왠지 더 묵직해진 건, 기분일까요?


젓갈집 어른들에게 기대치 않 응원과 격려, 칭찬을 받고 나온 아이의 어깨가 으쓱합니다. 저도 어릴 때 그랬어요. 엄마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 말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불편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어린 마음에 모르긴 해도 엄마가 뭔가 '덤'을 바라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껴지면 더 그랬어요. 젓갈집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저를 두고 아이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전 뭔가 바라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맹세코.


살다 보면 낯선 어른이 아이에게 해주는 따뜻한 한 마디, 칭찬 한 조각이 아이를 둥실둥실 춤추게 합니다. 매일 들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우리 엄마 아빠는 만날 같은 말만 하네, 할지 모르지만, 처음 보는 어른이 건네는 말은 느낌이 달라요. "넌 정말 큰 사람이 되겠구나!" "넌 어쩜 또랑또랑 말도 잘하니!" 지나가듯 어른들이 해 준 이야기가 마흔이 넘은 지금도 가끔 떠오릅니다. 누가 해 준 말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둘째가 대여섯 살 때 일이었을 거예요. 널찍한 카페를 조용히 돌아다니다 아이가 한 테이블 근처에 잠시 멈춰섰던 적이 있어요. 위에 무엇이 놓여있나 아이는 궁금했던 모양인데, 자리 주인이 갑자기 등장해선 큰 소리로 아이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너. 지. 금. 뭐. 하. 는. 거. 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박혔어요. 아이가 놀라서 제 곁으로 왔고 당황한 제가 얼른 사과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아이가 그냥 지나가다 본 거예요."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고 아무렇지 않게 또박또박 답했습니다."아. 닙. 니. 다. 괜찮. 습. 니. 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되지만, 아이가 그동안 보아온 여느 어른과는 언행이 달랐어요. 아이도, 저도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다가왔습니다. "아이가 너무 놀랐을 것 같아요. 이거 주세요." 그는 카페에서 샀을 쿠키 한 박스를 우리에게 건넸습니다. 하얘진 얼굴로 말없이 있던 둘째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제야 숨죽여 울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낯선 사람에겐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는 듯,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고는 소매춤으로 닦았습니다. "그 아저씨는 천사야. 우리 아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놀랐을까 봐 천사를 보내주신 거야. 괜찮다고."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울컥 눈물이 납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어요. 한 아이가 성장하려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입니다. 주변에서 쏟는 관심과 애정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흡수돼 아이가 어른이 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여행하면서 만난 어른들, 그들이 건넨 인사와 눈웃음, 긍정의 언어들이 아이들에게 또 다른 거름이 됐을 겁니다. 3년 후, 아이가 대학 가면 '할머니 젓갈집'에 다시 가자고 했습니다. 그땐 더 반갑게 맞아주시겠지요?


젓갈이 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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