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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07. 2024

40년 동안 책을 팔았다고?

백년 가게, 오래된 책방

속초가 좋은 건 서점이 있어서입니다. 어느 도시고 책 파는 곳이 없겠습니까마는 속초에는 오래오래 동네 주민들과 호흡해 온 책방이 있습니다.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해 온 '백년 가게'. 독서인구가 줄고 스마트폰으로 모든 정보를 소비하는 시대에 책을 팔아 이토록 긴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다니요. 3년 전 '동아서점'에 다녀왔고 이번엔 '문우당서림'으로 갑니다.

  

문우당 서림


아침 10시. 오랜 단골인 듯한 손님 한 둘이 오갈 뿐 평일 아침 서점은 한갓집니다. 오크빛 책장 사이로 빼곡하고도 단정하게 꽂힌 책을 보니 얕은 들숨이 감탄사처럼 배어 나옵니다. '여름'이라는 주제로 벽에 큐레이션 된 소설, 에세이, 동화책을 들여다보느라 걸음을 멈췄습니다. "처음 오셨어요? 저 안에도 많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저를 보고는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손님이 말합니다. 딱 봐도 여행객인데 저러다가 서점 다 못 둘러보고 갈 것 같았나 봅니다.

     

문우당 서림


그 사이 아이들은 사라졌습니다. 요 녀석들, 어디 있나. 저만치 책 숲을 헤쳐 발견한 아이들은 나란히 서서 책을 읽고 있네요. 뒤태가 여간 진지한 게 아닙니다. 멋진 녀석들. 역시 너희는 글선생 엄마 아들 맞구나. 발소리를 낮추며 귀한 뒤통수를 사진에 담고 보니, 스포츠잡지 코너군요. 어쩐지 말없이 가더라니. 그래, 재미나게 마음껏 읽어라.


 

여러 번 말해줘도 엄마는 절대 기억하지 못하는 낯선 해외 프로 선수들의 이름을 두 살 터울 형제는 평소 암호처럼 주고받습니다. 아이들이 세계 스포츠계의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사이, 전 서점 코너를 샅샅이 돌기 시작합니다. 대형서점에선 접하기 힘든 다양한 독립출판물, 감각적인 표지의 건축 및 예술 코너의 책을 들춰봅니다.



엄마를 슬쩍 보던 큰아이는 소설을 하나 챙겨 들고 구석 벤치로 갑니다. 대충 봐도 엄마가 금방 나갈 모양새는 아니었나 봐요.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책장을 넘깁니다. 세상에서 제가 가장 아끼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 책 읽는 모습이 그리 예쁠 수가 없었어요. 집중하는 두 눈은 고요히 반짝이고 앙 다문 입술은 반듯하고, 맑은 얼굴 속에 이따금 웃었다 찡그렸다가 표정이 바뀌는 걸 바라보면 흐뭇했습니다. 가끔 둘째가 배를 뒤집고 깔깔대며 바닥을 구르는 모습도 드물게 볼 수 있었죠. 앉아서 읽고 누워서 읽고. 소파에는 늘 아이들이 읽다 만 책이 뒹굴었습니다.

  

문우당 서림에서


얼마 전까지 우리 집 거실에 TV가 있었지만 전원이 켜지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전 무식할 정도로 오래 전부터 아이들을 디지털 세상에서 분리했어요. 새벽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던 시절, 아이를 시어머니나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맡길 땐 아이들이 TV만화를 즐겨 봤습니다. 직접 아이를 키우지 못해 남의 손을 빌리면서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육아 환경을 강요할 순 없었어요. 회사를 그만둔 후 가장 먼저 한 건 TV 시청 끊기. 책을 좋아하고 읽는 재미를 아는 건 살아가는 데 큰 유익이자 기쁨이라고 믿었거든요.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일을 즐기는 아이로 키우려면 책보다 재미있는 요소는 차단해야 했습니다. 어른들도 그렇잖아요. 책은 하다 하다 더는 할 게 없을 만큼 지루할 때 비로소 손에 잡힙니다. 저 역시 드라마, 예능과 결별해야 했죠.


덕분에 아이들은 집에서 책을 읽었고 도서관과 서점에 자주 가서 놀았습니다. 서점에서 산 책을 선물처럼 받아 들고 식당에 가면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사이 아이들을 새 책을 펴서 읽었어요. 저희 부부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지 않았고, 아이들은 그저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무언가 읽고 그리고 썼습니다.


특히 큰아이는 읽는 행위를 무척 즐겼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면접을 봐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아이는 집에서 챙겨간 소설 <팔 거리의 아이들>을 꺼냈습니다. 면접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 시험지 비슷한 걸 들고 '엄마!'를 부르며 뛰어다니는 북새통에도 아이는 홀로 진공상태에 있는 듯 턱을 괴고 책을 읽더군요. 전쟁이 나도 넌 책을 읽겠구나. 주변의 소음을 알아서 차단하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아이를 보면서, 고백건대 전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네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물론 그것만으로 아이가 완벽하게, 쉽게 잘 자랐다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책을 탐독하는 아이는 하늘이 준 선물 같았습니다. 때때로 아침에 옷 갈아입다 말고 책 읽고, 학교 갈 생각하지 않고 책 읽고, 침대서 작은 조명 하나 켜고 늦도록 책 읽어서 호통치는 일도 잦았지만 그건 복에 겨운 사소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큰아이에게 시선을 떼고 책을 뒤적이는데 둘째가 다가옵니다. 아, 이제 책에 몰두하긴 글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는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골랐다며 마치 숙제를 마친 꼬마처럼 엄마를 요리조리 쫓아다닙니다. "엄마 멀었어요? 언제 가요?" 에세이, 소설, 인문 영역, 아직도 둘러볼 책이 많은데, 2층도 있는데, 난감합니다. 결국 1시간이 넘어가자 둘째는 제 손에서 책을 빼앗고는 등을 떠밉니다. "자, 이제 2층에 갈 시간이에요. 엄마, 얼른 사고 싶은 책 고르고 우리 점심 먹으러 가요!" 덩치 큰 아이에게 떠밀려 2층에 올라선 저는 그곳에서도 둘째와 실랑이하느라 대충 둘러본 채, 바삐 인증샷만 남긴 채, 책 3권을 챙겨 들었습니다. 아이들도 각자 읽고 싶은 소설을 골랐네요.

   

2층 올라가는 길


여행을 가면 꼭 동네 서점을 들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고르게 합니다. 여행을 떠올리면 책도 자연스럽게 생각나도록,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 책을 읽을 때 여행 다녀온 기억이 고소한 냄새처럼 떠오르도록 말이죠. 로컬 서점이 활성화되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픈 바람도 담아서요. 지인에게 선물할 독립출판 서적 1권까지, 두 손에는 책 6권이 묵직하게 들렸습니다. "헉, 책값만 10만 원... 엄마, 설마 이것까지 여행 경비에 포함되는 건 아니죠?" 둘째가 밥그릇을 빼앗긴 듯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전 그저 아이를 바라보며 답합니다. "아들, 다음에 또 오자. 못 본 게 너무 많아. 그땐 2층부터 시작해야겠어."   

   

두 손 가득 책


이틀 꼬박 뭐 먹을까 고민하고, 많은 식당 가운데 먹성 좋은 사춘기 아이들의 취향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곳을 고르고 의견을 모으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지만, 그래도 이번 속초 여행이 소모적이지 않았던 건 첫날 아침 들른 오랜 서점 덕이었습니다. 서점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친절하게 적혀 있었어요.

  

"문우당서림은 1984년도에 태어난 속초의 로컬 서점입니다. 인구가 10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 속초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역의 서림으로서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초점책을 보는 아이부터 책력을 살피는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은 어쩐지 가장 자연스럽고도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더더욱 소중한 일상의 풍경이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림은 그러하기에 우리 모두의 취향과 이야기를 담아줄 수 있도록 조금 더 단단하고 안정감이 있는 그릇이 되고자 합니다. 그 그릇을 빚어가는 과정이 때로는 서툴고 어색한 손길이 묻어날 수도 있지만, 천천히 가장 우리다운 모습과 속도를 만들어가겠습니다."



40년 세월이 담긴, 책과 사람의 공간. 볼 것, 먹을 것, 읽고 채울 것까지 가득한 곳. 이러니 제가 어찌 속초를 아니 좋아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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