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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30. 2024

36시간 먹방, 꽉꽉 채워 여섯끼

맛집 탐방의 명과 암

"새벽 5시에 일어날 수 있어? 힘들겠지?"

극적 화해를 이룬 엄마와 두 아들은 이제 한 편이 되어 떠날 채비를 합니다. 집에서 속초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무줄입니다. 출근 시간에 맞물리면 3시간이 훌쩍 넘어갑니다. 일찍 출발하는 게 관건. 길에서 오래 머물다가는 끼니를 놓칩니다. 1박 2일 짧은 여행에서 한 끼, 한 끼는 여행의 만족도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죠. 한여름 꼬릿한 땀내를 풍기며 늦잠을 즐기던 둘째 얼굴을 슬쩍 살핍니다. 너무 이르다고 반발할까 싶어서요. "그럼요. 일어날 수 있어요!" 여행 당일, 둘째는 알람 소리에 발딱 일어났습니다. 맛난 음식이 잠을 이깁니다.

     

뿌옇게 흐린 하늘,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울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오자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립니다. 성수기가 지난 고속도로를 슝슝 달리는 기분! 우리의 첫 목적지는 물횟집. 아침식사로 백반을 먹긴 아쉽고 이른 아침 문을 연 식당 중 단연 눈에 들어온 곳입니다. 다만, 더운 여름 시원한 물회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오픈런에도 대기 2시간, 대기번호 80번까지 받았다는 후기가 마음에 걸립니다. 방법은 하나, 바지런히 달려야죠.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픈 20분 전. 대기번호 4번을 받고 식당 문 열자마자 당당히 입성합니다.


"우리 산오징어 물회랑 가자미 물회, 회덮밥을 시키면 어떨까요?" 평소 같으면 무조건 특, 곱빼기를 시켰을 큰아이가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고 제안합니다. 더 많이 먹고 싶은 둘째표정이 바로 달라지자 큰아이는 설명을 시작합니다. "봐봐, 우리 아침 첫 끼야. 분명 하루종일 이것저것 많이 먹을 거야. 그렇지? 첫 식사에서 너무 무리하지 말자."      


전날 밤, 아이들에게 제가 말해둔 게 있었어요. "이제껏 여행 다니면서 너희들이 먹고 싶은 건 무조건 다, 많이 사줬는데 이번에는 음식에 너무 욕심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예산을 미리 정해놓고 가려고 해." 그동안 우리 집 여행의 팔 할은 '뭐 먹을까?'로 시작해 '맛있으니 또 먹자'로 끝났어요. 음식이 여행의 동력이자 전부였죠. 우리 집 가장과 그에게 ‘맛의 정석’을 배운 두 아들은 현지 맛집을 다 훑고 가리라는 자세로 저돌적으로 먹었습니다. 하루 다섯 끼, 여섯 끼도 가능하다는 주의였죠.


하지만 전 생각이 달랐어요. 여행 가서 먹기만 하면 어찌하나요. 새로운 걸 보고 듣고 경험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삼시 세 끼만 맛있게 먹어도 충분한데 그들은 아침 먹고 돌아서서 간식으로 순대국밥을 먹고 다시 점심 먹고 그 사이에 국수 먹고 저녁으로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극도의 포화상태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또 배를 채운다는 건 제게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어요.

 

속초는 산과 바다가 둘러싸고 호수까지 자리해 식재료가 풍부하고 먹거리가 다양합니다. 그 모든 걸 다 먹고자 한다면 1박 2일 동안 정신없이 먹기만 하고 돌아올 것 같았어요. 예산을 정한 건 제 나름의 방법이었죠. 넘치도록 먹는 풍성함도 있지만, 정해진 경비 안에서 요리조리 아이디어를 짜내며 여행하는 묘미도 경험케 하고 싶었습니다. 살면서 어찌 여유롭고 넉넉한 여행만 다닐 수 있겠어요.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이번 여행의 예산을 알려줬고, 큰아이에게 회계 역할을 맡겼습니다. 이틀 동안 여섯 끼, 간식과 야식까지 먹고 싶은 큰아이는 영민하게 돈 계산을 시작했습니다.


물회


잠시 후, 매콤 달콤 새콤한 빨간 육수 위로 하얀 회가 소복하게 쌓인 물회가 나왔습니다. 쫄깃쫄깃 탱글탱글한 회를 육수와 함께 한입 가득 넣습니다. 소면을 넣어 후루룩, 밥을 말아 후루룩. 아, 아침부터 행복합니다. 그 사이 대기 인원은 배로 늘어나 식당 주변으로 사람이 북적거립니다. 도착하자마자 밥 먹는데 성공했다는 뿌듯함! 여행 시작이 순조롭습니다.


근처에는 마늘 바게트로 유명한 빵집이 있었어요. 여행이 착착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기쁜 엄마는 빵집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곳 역시 평소에는 붐비지만 지금은 이른 시간이라 한적합니다. 따끈하게 나온 새 빵을 영접하는 건 두리둥실 뭉게구름을 뱃속에 넣은 기분이죠. 매대 가득한 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우리를 저지하는 건 역시 큰아이. 어렵게 어렵게 고민 끝에 빵 여섯 개를 두 손 가득 골라 나옵니다. 빵은 남아도 집에 가져갈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빵, 빵, 빵!


     

점심은 고민 끝에 가오리찜으로 결정했습니다. 우선순위에 없던 곳인데 맛깔스럽게 간을 한 가오리찜이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아이들은 공깃밥을 더 시켜 양념을 얹고 착착 비벼 먹습니다. 무와 감자도 으깨 먹는 맛. 침 넘어갑니다.

 

가오리찜


첫날의 하이라이트인 저녁 식사. 큰아이가 선호하는 생선회와 둘째가 원하는 홍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해가 졌습니다. 이날 횟집과 홍게집 방문은 모두 실패했어요. 횟집은 쉬는 날이었고 홍게집은 이날 재료 소진으로 일찍 문 닫았다고요. 먹는 일에 예민한 둘째가 볼멘소리를 해요. "전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게를 먹는 거였어요..."


성수기가 지난 평일 저녁, 속초 식당들은 일찍 문을 닫네요. 어렵사리 냉면집으로 갑니다. 예전 속초에 왔을 때 명태회냉면과 오징어순대를 맛있게 먹던 곳이에요. 늦은 저녁, 마지막 손님으로 입장한 감격에 젖어 우리는 그때 추억을 소환합니다. 3년 전 먹었던 냉면과 순대 맛을 아이들은 고스란히 기억합니다. 아, 이래서 남편이 아이들에게 맛집을 기꺼이 데리고 갔을까요.

   

명태회냉면과 오징어순대


다음 날, 우린 대망의 홍게집을 찾아갑니다. 둘째를 실망시킬 순 없죠. 홍게집은 미리 전화해봐야 합니다. 그날 게를 얼마나 잡느냐, 배가 언제 들어오느냐에 따라 우리의 식사 여부도 결정됩니다. 조금 이따 와 보라는 애매한 답만 듣고 식당으로 향합니다. 배에서 갓 잡은 홍게를 먹으려면 이 정도는 감내해야죠. 예약에 성공! 이곳은 무한 리필입니다.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가 식탁 위에 턱 올라가 있습니다. 시간 맞춰 온 사람들이 비닐장갑에 손을 넣고 다 같이 사장님 설명을 듣습니다.


"게가 나오면 그때부터 100분 동안 드시면 됩니다. 게는 저희가 알아서 리필해 드립니다. 쏙쏙 안 빼먹고 남기시면 한 마리에 만 원씩 받습니다. 마지막에만 ‘몇 마리’ 먹겠다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게장볶음밥과 홍게라면은 별도 주문입니다. 일회용 장갑은 더 드리지 않습니다."

    

무한리필 홍게_신기했던 경험


따끈따끈하게 갓 쪄 나온 홍게 앞에서 우린 매우 전투적이었어요. 모르긴 해도 그날 같은 시간, 식당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많이 먹었을 거예요. 저보다 덩치 큰 아이들에게 게살을 발라줄 필요도 없고, 어찌 먹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두 손으로 게 다리를 뚝뚝 끊으면서 얼마나 감격했던지요. 세상에, 아이들이 게 다리를 스스로 뜯어먹을 만큼 다 컸구나! 심지어 아이들은 게살을 꼼꼼히 발라서 엄마에게 건네기도 했습니다.


우린 전날 야식으로 닭강정을 먹으면서 영화를 봤고 아침은 숙소에서 전복죽을 먹었습니다. 쟁여놓은 빵도 틈틈이 먹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퇴근 시간을 고려해 점심 식사 후 바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큰아이가 좋아하는 회는 넉넉하게 포장해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와 저녁으로 먹었죠. 아주 만족스러운 여행이었습니다. 물론 남편이 준 맛집 목록을 이틀간 섭렵하긴 무리였습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그가 정리해서 준 식당만 21곳이었거든요. 그래도 충분했어요. 아이들도 저도 각자 원하는 것을 모두 즐겼거든요.


만날 먹는 데만 골몰하는 여행이어서 제가 불만이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깨달은 게 있어요. 여행은 목적과 방법이 다양합니다. 액티비티 즐기기, 일상에서 벗어나 그저 쉬기, 관광명소를 찾아가 사진으로 남기기. 미식 여행도 그중 하나죠. 현지에서만 나는 신선하고 독특한 재료를 고유한 요리법으로 만든 음식은 그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진미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지닌 오감을 동시에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건 미식 여행이 유일할 거예요.


남편은 맛집을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각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한 음식을 소개했어요. 여행객보다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을 가려고 애썼구요. 덕분에 아이들은 허름한 '노포'에서 먹는 맛을 압니다. 그런 곳은 주인도, 손님들도 특별해요. 어린아이들이 현지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마다 주인은 물론 동네 어른들이 기특하다며 어찌나 칭찬하던지요. 음식이야말로 아이들과 낯선 어른들을 이어주는 매개였을 거예요. 맛과 향기가 더해진 여행이 깊고 풍성하게 아이들에게 남았다는 걸 이번에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남편이 이 글을 보면 으쓱하겠어요.


그래도 여보, 다섯 끼는 너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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