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너의 의미는,
건축 에세이를 써오라는 말에 조금은 얼어붙었었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러워졌었다. 건축을 5년이나 공부했고 해외 생활을 좀 해 본 나라는 사람에게, 건축 에세에를 써오라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나는 왜 이렇게 벌써부터 두렵고 걱정이 되는가?
거짓말 않겠다. 권태, 짜증, 원망, 질투, 회피, 걱정, 자괴감, 우울감... 20대에 느꼈던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들의 중심에는 건축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긍정적인 감정들의 중심에도 건축이 있었지만, 지금 내 인생에서 '건축'이 주는 그 무게감은 그리 가볍지가 않다.
하지만 '건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고향 제주를 떠나 멀리멀리 서울로 상경한 사람이고 앞으로 뭐 하면서 먹고 살 거야?라는 질문에 '건축'말고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굉장히 동경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 큰 양가감정을 들게 하는 대상이 나에겐 건축이다.
학교를 다니는 결코 짧지 않은 5년의 기간 동안에는 그저 상상의 동물을 무서워하는, 본 적도 만져 본 적도 없는 용의 존재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지도 존재하지 않은지도 모르는 그 용의 존재를 찾아내려 매일 고군분투하는 중세시대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다만 대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인으로서 살고자 찾은 건축의 세계에서 찾은 그 '용'의 존재는 생각보다 더 볼품없어 보였고 많은 방면에서 내 예상과는 달랐다.
서울에 오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던 그 회피적 마음가짐은 보기 좋게 나에게 세상의 쓴 맛을 보여주었고 나는 '절이 싫으면 중이 나와야지'라는 흔하디 흔한 말로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했던 서울 건축 회사를 2개월 만에 퇴사하고 만다.
결국 세상살이란 이런 것일까?
'그래도 해보자'라는 마음은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라는 회의적 마인드로 회귀하게 하고, '나는 생각보다 멋진 사람인가 봐!'라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마음은 '역시..'라는 불 품 없는 혼잣말을 하게 만든다.
사실 처음 서울 회사에 합격했다고 문자를 받은 그 순간부터 난 단 하루도 무섭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그 무서움을 무시하기도 하고 이겨내기도 하면서 버틴 회사생활을 마치고 퇴사를 선택하면서 나는 적지 않은 충격과 좌절을 겪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으며, 실제든 미디어를 통해서든 좋은 사람을 보아도 "저렇게 좋은 사람도 회사에서는 엄청 별로인 사람일지 몰라"라며 생각하기 일쑤였다. 수직/수동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2달을 버티다 보니 말수는 저절로 줄어들었으며 '말'을 하는 것 자체에 큰 어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2달 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습관처럼 허리를 꼿꼿이 새우고 양손을 식탁 뒤 내 무릎에 얹혀두어 묵묵히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술자리 앞에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말고 내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동안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사를 하고 다시 든 생각은, '역시나'나는 여전히 건축이 좋고 하고 싶다! 였다. 5년 간 셀 수 없었던 밤 샘 작업, 자괴감과 자기 연민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 하나,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했던 그 단 하나의 이유는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희생시킬 정도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정이 있다는 것은 솔직히 거짓말이다. 나에게 건축은 5년간 수도 없이 싸우고 화해하며 지켜온 소중한 우정이며 사랑이다. 그리고 그 우정과 사랑은 할 수만 있다면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지키고 유지시키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왜 건축이라는 꿈을 이토록 지키고 싶을까?를 생각해 봤다. 나는 왜 건축을 해왔는가?
사실 건축학과를 5년간 다녔고 무사히 졸업장까지 받았으니.. 어쩌다 보니 건축을 계속해왔다고 대답하는 게 어찌 보면 가장 보편적이고 큰 노력이 들지 않는 답변이기는 하다. 하지만 인생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질문들을 집중적으로 받는 이 중요한 시기에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깊이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왜, 건축을 하고 싶은가?
이유 1. 나는 끊임없이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다.
"건축학과는 어떠니, 현수야!"
나를 건축으로 입문하게 한 한 마디. 수시 6곳을 모두 떨어지고 어떤 대학이든 붙고 싶었던 나는 전공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는 나에게 이 한 마디를 하셨고 나는 그날로 내 수능 점수로 넣을 수 있는 건축학과는 다 넣었다.
부모님이 내가 건축학과 가는 것을 제안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림 그리는 걸 아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고 그 작품들이 부모님 눈에는 아주 좋아 보였던 듯하다(지금은 그림에 대해서라면 너무 대단한 사람을 많이 봐서 결코 자랑할만한 실력은 아니라는 걸 알아 부끄럽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생각과 내 관점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나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했다.
그림이든, 글이든, 발표든, 춤이든 나라는 사람을 어떠한 수단으로 표현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초등학교 백일장대회, 웅변대회부터 대학교 영어발표대회까지. 그리고 그런 성향이 내 진로에까지 스며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건축은 그 건축가나 그 건축 회사가 어떠한 제한선에서 본인들을 최대한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어떻게든 표현했다. 그리고 건축학과를 끝까지 다닐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결국 내가 어떤 결과물을 내놓게 되든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건축이라는 수단으로 보여주고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겐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결과가 좋았으면 좋겠는 그런 욕심으로 지금까지 '건축가'라는 꿈까지 이어갔던 것 같다. 동시에 그럼 나는 어떤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따라다녔고 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독서와 일기 쓰기라는 취미로 이어졌다. 또 어떤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항상 다른 답변을 가져오기에 한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 늘 똑같지 않은 것 아닐까?
이유 2. 나는 세상에 뭔가를 주고 싶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함과 사랑 그리고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싶다'
내가 어떤 힘든 일을 겪고 마음이 가난해지려고 할 때 늘 결국 생각의 고리를 끝맺음은 이 문장이었다. 끝없는 돈과 명예를 좇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나는 그래도 선하게 살고 싶고 베풀고 살며 결국 우리는 우리로써 살아야 함을 믿으며 살고 싶다.
개개인의 성공과 업적을 중요시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공동체의 가치를 1순위로 삼으며 내가 가진 것을 세상과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고 싶다. 이러한 가치와 정신을 건축에서 찾겠다는 말이 어찌 보면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의 어설픈 선언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나에게 건축이라는 업이, 건축가라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였던 이유의 중심에는 그들이 가진 예술적 능력, 감각, 철학과 정서를 타인의 보금자리로서 계획하고 실현화하는 것이 너무나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건축 설계로 경력을 쌓게 되면 나의 의견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트레이닝을 거듭하게 되니 이 꿈을 실현하는 데에는 최소 몇십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묵묵히 하나씩 하나씩 내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간 이 무형태의, 아주 아주 멀리 있는 이 꿈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왜 그래도 건축을 하고 싶을까? 에 대한 질문을 사실 오랫동안 회피하고 있었다. 그 흔한 "먹고살아야지"라는 속세적인 핑계에 휩싸여 그 답변을 하는 것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냥 하는 거지'라는 말이 주는 안일함과 편함에 기대어 마음 깊숙이 나 스스로와 대화를 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생의 나, 대학생의 나, 그리고 현재의 나까지 만날 수 있었고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근본적인 질문들로 나와의 깊은 대화를 해봐야겠다. '그냥'사는 것이 편하고 지속가능성이 있는 삶의 태도일 수 있지만 가끔은 방구석 철학자, 지식인처럼 사고하며 깨닫는 하루하루도 꽤 즐거운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계속 필수적으로 이 질문은 나를 지겹도록 따라다닐 것이다.
"너, 어떻게 살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