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식물
이십 대 초반에 비누 가게에서 일을 했었다. 누구라도 특유의 향기를 맡으면 150m 전방에 매장이 없을 수 없다 말하게 되는 브랜드였다. 열흘에 한 번 직원이 둘둘 쌓인 신문지를 안고 출근을 했다. 그럼 나는 집기를 닦다 말고 싱크대 앞으로 갔다. 주로 얌전한 국화꽃과 연보라 스토크가 때로는 해바라기나 빨간 장미가 힘 있게 화병을 채웠다. 늘 신선한 꽃이 갱신돼야 한다는 브랜드 방침은 반복되는 지루함을 조금 달래주었다. 여름이면 삼청동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빛깔로 해가 저물었고 그 풍경을 보며 꽃을 샤워시키는 게 내 낙이었다. 물방울이 내려앉은 꽃을 보다 휴일에 꽃시장이나 가볼까 생각했다. 그렇게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두세 가지의 꽃을 사 왔다. 꽃의 이름이 적힌 영수증도 잊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앉아 신문지를 끌어안고 오전을 보내면 왠지 부지런히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에이 왜 사 왔어 금방 시들 텐데~ 하며 은숙 씨가 싱크대 앞으로 왔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받은 꽃이 언제였을까. 종종 사 와야지 싶었다. 젖은 신문지를 풀고 색색의 꽃가지를 보자 은숙 씨는 해사하게 웃었다. 꽃의 생명력에 한아름 전염되고 말아 수인아 내 폰 어딨지, 했다. 오후쯤이면 은숙 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있었다. 거실에 둔 꽃을 보며 가족들은 이름이 뭐냐 궁금해하거나 한 번씩 웃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가끔씩 사 오는 꽃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반가워했다.
꽃을 피우지 않는 초록 식물은 집에 많았다. 베란다의 이름 모를 식물들. 거실의 나무들. 익숙해서인지, 직접 데려온 게 아니어서인지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은숙 씨가 "이 나무 정말 많이 자라지 않았니?" 하면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원래 그 정도 사이즈 아니었나. 은숙 씨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이만했잖아! 기억 안 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 말고도 나무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으면 은숙 씨는 청소를 하다가도 이리 와보라 했다. 얘 좀 보라고. 보라 해서 본 거지 먼저 알아차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겐 벽지 같은 익숙함이었나 보다. 식물 돌보기는 설거지나 빨래 개는 일 같이 접근이나 참여가 쉬운 일이 아니다. 살뜰히 돌보는 게 어려운, 취미와 살림이 결합한 고급 영역이다.
초록 식물은 치앙마이에서 처음 길러보았다. 완벽한 타지에서 매일을 보내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고 더는 어색하지 않을 쯤이었다. 저녁을 먹다가 태식이 근처에 꽃시장이 있다고 내일 아침 가보자 했다. 그는 내가 꽃시장을 좋아하는지는 벌써 알고 있었다. 사귀기 전에도 태식은 내게 꽃시장에 같이 가달라고. 좋은 화병과 예쁜 꽃을 함께 골라달라는 로맨틱한 부탁을 했었다.
치앙마이는 우기를 벼르고 있는지 태양이 쨍쨍하기만 했다. 뙤약볕이 차오른 다음 날, 우리는 그랩을 타고 가든 마켓에 갔다. 우거진 도시를 닮아 꽃보다도 나무와 식물이 많았다. 이 참에 고수나 길러볼까 눈에 불을 켜고 고수를 찾았다. "태식아, 고수 이런 거 없나 봐 봐. 고수, 바질, 대파, 타임, 로즈마리 이런 거 키우면 딱이야. 요리할 때 넣어 먹자." 그는 내게 먹을 생각만 한다며 웃었다. 우리는 로즈마리 화분을 데려왔다. 집에 오니 나시 자국이 선명했다. 두 어깨가 까맣게 그을려선 촌스러운 영어 이름을 몇 개 읊조렸다. "음. 치앙 마이니까 마이로 하자." 우리는 자주 로즈마리 향이 벤 와인을 마시다 잠에 들었다.
흙의 양분을 먹고사는 자기만의 평수를 가진 화분은 내게 책임을 더 부여했다. 관리를 어떻게 해주냐에 따라 오래, 더 크게 살 수도 있는 지속성과 가능성을 지닌 게 초록 식물이었다. 마이는 비를 흠뻑 맞고 뜨거운 해를 보는 극단적인 날씨가 좋았는지 먹어도 줄어들지를 않고 잘만 자랐다. 호스트였던 애플에게 화분을 부탁하고 우리는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거실에 있던 나무가 자란 건 못 알아차려도 치앙마이 나무가 유난히 컸던 것은 몸이 기억했다. 한국의 나무가 이렇게 정갈하고 작았었나. 집에 오니 이름 모를 식물이 많은 베란다도 여전했다. 식물을 기르던 기분을 점차 까먹었고 우리는 때때로 마이를 그리워했다.
며칠 전, 은숙 씨가 이 식물 자란 것 좀 보라고 나를 또 불렀다. 이번에는 정말 초면이었다. 난감했다. 너가 그때 촬영한다고 사온 식물이잖아, 은숙 씨가 말했다. 조금 뒤에야 기억이 났다. 하반기 구직활동을 하다 포트폴리오 영상이 필요해 급하게 산 식물이었다. 시나리오 상 그 잎을 떼어내야 해서 앙상한 가지만 남았었는데 지금은 몰라보게 무성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얘가 걔라고? 했다. 얕은 친분의 사람이 유명해지거나 잘 나가게 되면 아는 체하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건가 보다. 우리 같이 영상에 출연했던 사이였지, 나는 되뇌었다. 그날부로 직접 키우겠다며 방에 데려오기까지 했다. 알아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고 있던 식물이 기특했다. 나도 보이지 않게 자랐을지도, 달라졌을지도 몰라. 왠지 위로가 되었다. 달라진 건 있었지만 형태가 있진 않았다. 나 혼자 아는 걸로 충분한 거겠지. 이따금 물을 주었을 은숙 씨에게 내심 고마웠다.
따뜻한 실내를 좋아하는지 연두색 새 순은 더 많아졌다. 화분 가게에 가서 머그컵 크기의 토분에 옮겨 심다가 이름을 물어보았다. '산호수'란다. 산과 호수를 결합한 이름이라니. 보기보다 야망 있는 식물이로구나, 생각했다.
무관심에서 출발한 관심. 꽃과 식물을 기르는 일은 비슷하고도 달랐다. 기분을 싱싱하게 했고 자꾸 쳐다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무엇이던 본질은 숨길 수 없는 걸까? 자연이 뿜어내는 생명력,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같이. 숨겨질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 태식이와 그 겨울 꽃 시장에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게 된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어제는 '우수'였다. 비가 내리고 싹이 틈.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튼다, 말한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 사실은 모든 게 다가오고 있다. 산호수를 기르며 가끔 또 꽃시장에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