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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간인 박씨 Sep 30. 2020

텃밭과 뿌리 내림의 속도에 관하여


지난봄  집 할머니네 밭이 아니라 우리 마당에 작게 텃밭을 내기로 결정했다. 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괜히 할머니가 성가실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즐겁자고 하는 일이 서로 스트레스가 되겠다 싶어 우리 집 담 아래 잔디를 걷어내고 개간 돌입했다.


제일 처음 한 일은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명 지난 글에 쑥을 봐서 설렌다고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에게 쑥은 나물의 의미를 잃고 무척 끈질긴 잡중 하나가 됐고 그즈음 옆 집 할머니가 `남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잡초를 뽑아야 된다'라고 조용히 얘기하시고 간  거의 이주 넘게 잡초의 늪에서 허덕였다. 결국 손으로 뽑기를 포기하고 잡초 제거제를 뿌린 후 2평 남짓한 땅을 파내고 돌로 경계석을 쌓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사무실에서 힘들 때 종종 '시골 가서 농사나 짓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농사는 무슨, 텃밭에서 겨우 삽질 하루하고 근육통으로 다음날 내내 앓았다. 글을 쓰려고 과장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경계석을 찾으러 근처 공사장에서 돌을 날라 옮길 때부터 몸살을 예상했었어야 했지만, 우리는 요령이 없었고 마음은 급했다.)


경계석을 쌓은 뒤 그냥 저 위에 흙을 사다 올리면 되나 고민하는 우리를 보고 결국 할머니가 뛰어내려 오셨다. 파낸 흙에 있는 마른 '떼'를 다 골라내야 한다며 호미와 삽, 곡괭이를 챙겨 오셔서 직접 골라내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줄곧 잔디로 덮여있던 땅은 쉽게 깨끗해지지 않았고 체를 사 와 흙을 고르는 작업까지 꼬박 이주가 걸렸다.


이렇게 예비작업을 마치고, 흙까지 주문해 얹는 것을 완료했을 때는 지난 4월 경. 얼추 알고 있던 모종 심는 때와 딱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고, 신나고 들뜬 마음에 모종을 구하러 문턱이 닳도록 매번 장에 나가봤지만 어째서인지 도통 모종의 털끝 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 쇼핑몰 이용이 편리한 도시 것들 답게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모종을 주문했더랬다. 이때가 모종 심기 시즌1. 마당에 나란히 앉아 모종을 심는 우리를 보며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이 호호 웃으며 '너무 빠른데~'하고 지나가실 때만 해도 우린 일단 심으면 알아서 자라겠지 하는 긍정적인 마음이었다.


모종심기 시즌1

결과는 이틀 만에 다 얼어 죽었다. 깨끗하게 얼어 죽었다. 전부.


이어서 좀 기다리다 5일장에 나가서 다시 구매한 모종들을 심은  모종 심기 시즌2. 시즌2 때는 텃밭 구조가 잘못된 줄 알고 물길부터 흙 모양까지 다 다시 자리를 잡았지만 슬프게도 2차 시도도 다 얼어 죽였다 :(

모종심기 시즌2


인터넷 구매했을 때 양 조절도 못하고 또 꽤 비싼 가격으로 많이 샀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 먹을 때 드는 일 년 치 고추 상추값보다 많이 들었을 것이라며 슬퍼했다.


모종 심기 시즌3. 두 번의 실패 끝에야 알게 된 냉해의 이유는 내가 사는 곳이 해발 800미터가 넘는 산골짜기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알고 있던 모종 심기 시기를 한참 지나 5월 중순이 돼서야 다시 모종을 사다 심었고, 두 번의 실패에서 얻은 값진 경험을 더해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모종들은 겨우 무럭무럭 자기 시작했다.

모종심기 시즌3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처음에는 매일매일 물도 주고, 금이야 옥이야 돌보던 텃밭 3종 세트는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지나며 아무리 열심히 먹어도 둘이 먹기에 너무 많은 양이 되었고, 인근에 모든 분들이 '농사'를 짓는 상황에서 나눠드릴 분들도 없었기에 자체 처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ㅎㅎ 결국 각자 본가에 갈 때마다 최대한 수확해 어머니들 가져다 드리고 있다.


한편 여름 내내 온 많은 비로 여름상추는 웃자라게 되었고, 씁쓰레하고 맛이 없어 따먹지도 못하다가 결국 나무처럼 기다랗게 키가 커버렸는데 나름대로 꽃나무같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두고 있다.




반년 정도 텃밭을 키우며 문득 든 생각은 뭐든지 때가 있구나,  남들보다 빨라도 마냥 좋지는 않은 거구나 하는 것이었다. 무 빨리 심어버린 4월의 모종들처럼 나도  준비가 다 되지 않은 채 사회에서 냉해를 입었던 거구나. 처음부터 온실에서 더 튼튼하게 준비되어 따듯한 5월에 심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


누가 텃밭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냐고 할 수 있지만 냉해를 입었던 모종들도, 세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뿌리를 내린 모종들도 그냥 나를 보는 것만 같아, 나만 이 작은 상추를 들여다보며 괜히 마음이 어지러운 생각을 하나 싶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지겨울 만큼 수확물을 내놓는 내 작은 텃밭처럼 나도 이제 냉해 없이 뿌리를 내릴 때가 왔다는 어스름한 뭔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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