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가(郭嘉) | 通
조조의 참모 중 곽가(郭嘉)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고비 때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조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품행이 바르지 못했다. 조조 앞에서도 침을 뱉고 욕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곽가를 탄핵하라”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는 끝까지 곽가를 내치치 않았다. 재주는 재주, 품행은 품행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만큼 곽가를 아꼈다.
조조와 곽가는 첫 만남부터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순욱의 추천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보자마자 “내 대업을 이루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며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희지재(戲志才, 조조의 초기 모사)가 죽은 뒤 함께 일을 헤아리며 의논할 사람이 없소. 여남과 영천에는 빼어난 사람이 많으니, 누가 그 뒤를 이을 만하오?”
그러자 순욱은 곽가를 추천했고, 그를 만나 천하의 일을 논의한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대업을 이루게 해 줄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다.”
이때 곽가 역시 조조와의 만남을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로 내 주인이시다.”
― 《삼국지》 권14 〈위서〉 ‘곽가열전’ 중에서
곽가가 볼 때 조조는 똑똑하고, 세상을 읽는 눈 역시 매우 뛰어났지만, 좌고우면할 때가 많았다. 의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곽가는 조조의 가려운 곳을 때때로 긁어주며,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곽가를 향한 조조의 신임은 누구보다 특별하고 두터웠다. 항상 데리고 다니며, 그의 말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그만큼 조조의 마음을 꿰뚫보고, 명쾌한 해법을 제시했다.
조조가 삼국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로 꼽히는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략 역시 곽가의 머리에서 나왔다. 만일 이때 조조가 전투력 열세를 이유로 원소와의 전투를 피해야 한다고 한 다른 참모들의 말을 들었다면, 조조의 시대는 훨씬 늦어졌거나, 아예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조조는 원소가 질 수밖에 없는 10가지 이유와 공(조조)이 이길 수밖에 없는 10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 곽가의 말을 믿고 전투를 강행했고, 결국 원소를 이기면서 다른 군벌을 압도했다. 바야흐로, 조조의 시대를 연 주인공은 곽가인 셈이다.
조조가 곽가를 신뢰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통찰력과 사람 보는 안목 때문이었다. 예컨대, 당시 많은 사람이 강동의 젊은 맹주 손책(孫策)을 두려워했지만, 그만은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라며 그를 무시했다.
손책이 이제 막 강동을 아우르며 죽인 이들은 모두 영웅호걸이며, 주군을 위해 죽을힘을 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손책이 경박하여 이를 대비하지 않으니, 제가 보기에 그는 필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 《삼국지》 권14 〈위서〉 ‘곽가열전’ 중에서
과연, 그의 예측대로 손책은 스물여섯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조조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가 원술을 치겠다며 허도를 빠져나가자 “유비는 새장에 가둬 두어야지 밖으로 내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라며 빨리 뒤쫓아 가서 그를 죽이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유비의 야심과 그릇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대로 유비는 천하의 인재를 속속 끌어들이며, 조조의 강력한 라이벌로 급부상했다.
조조는 생전에 두 명의 신하를 가장 믿고 의지했다. 순욱과 곽가가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순욱이 조조와 대립 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반면, 곽가는 죽을 때까지 조조와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곽가의 정세 분석은 귀신도 울고 갈 정도였다. 그만큼 하늘과 땅을 꿰뚫는 뛰어난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곽가가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러자 조조는 그의 죽음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조가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인데, 오직 봉효(곽가의 자)만이 가장 젊었소. 천하의 일이 끝나면 뒷일을 그에게 맡기려고 하였는데, 이렇게 요절하니, 이것이 운명인가 보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올렸다.
“군제주(軍祭酒) 곽가는 정벌에 뒤따른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있어 그가 도모한 공이 높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명이 짧아 사업을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식읍 8백 호를 늘려 예전과 합쳐 모두 1천 호가 되게 해주십시오.”
― 《삼국지》 권14 〈위서〉 ‘곽가열전’ 중에서
《삼국지》에는 수많은 책사가 등장한다. 주목할 점은 그들 대부분이 병법보다는 정치에 능한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곽가만은 예외였다. 그는 지략과 병법에 모두 능했다. 이에 많은 역사학자가 곽가를 일컬어 “제갈량과 주유보다 지략 면에서 훨씬 뛰어났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곽가는 깊은 통찰력이 있고, 모략을 세우는 데 뛰어났으며, 사리와 인정에 통달했다.”
― 《삼국지》 권14 〈위서〉 ‘곽가열전’ 중에서
물론 곽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역시 적지 않다. 11년이나 조조 곁에 있었지만, 내세울 만한 공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조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항상 곽가를 가장 먼저 찾았다.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조조가 함께 살아 돌아온 참모들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때 조조가 갑자기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했다.
“봉효야! 봉효야! 어찌하여 네가 먼저 갔느냐. 네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인데…”
― 《삼국지》 권14 〈위서〉 ‘곽가열전’ 중에서
곽가는 조조가 세운 전략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안 된다’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조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술을 세우는 데 열중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곽가와 조조는 궁합이 잘 맞았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 닮은 점이 많았고, 많은 점에서 통했다.
그건 조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조는 자신의 책사 중 순욱을 으뜸으로 치켜세웠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곽가뿐이었다고 했다.
천하인 중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소. 오직 봉효만이 내 마음을 알았소. 그런 그가 없는 지금, 몹시 애석하고 안타까울 뿐이오.
― 《삼국지》 권1 〈위서〉 ‘무제기’ 중에서
아닌 게 아니라, 곽가의 죽음 이후 조조의 남방 점령과 천하 제패는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반면, 제갈량을 책사로 얻은 유비는 비로소 운이 트이면서 삼국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조의 처지에서는 곽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두고두고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