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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Oct 30. 2022

약점이 너무 많았던 조조의 최고 책사

― 가후(賈詡) | 慧



조조 최고의 책사

큰 권력을 노리기에는 약점이 너무 많았던 탓에 언제나 피동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가후는 순욱, 순유와 함께 조조 최고의 책사로 불린다. ⓒ 이미지 출처 - new.qq.com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의 변화를 꿰뚫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한 인물을 두고 한 말이다.


삼국지강의로 유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리중텐 역시 그를 가리켜 제갈량보다 뛰어나다라며 다음과 같이 치켜세웠다.


처세에 매우 능해 난세를 살면서도 천수를 누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과연,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순욱, 순유와 함께 조조 최고의 책사로 불리는 가후(賈詡)’가 그 주인공이다.


가후는 시대를 꿰뚫는 혜안을 지닌 인물언제나 정도(正道)를 주장했던 위나라 개국의 일등 공신이었다. 또한, 나서야 할 때가 아니면 함부로 나서지 않았고, 논공행상 역시 전혀 다투지 않았다. 출세에 관심 없어서가 아니다. 가후는 큰 권력을 노리기에는 약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가후는 조조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았다. 조조에게 귀의하기 전 동탁(董卓)의 사위인 우보(牛輔)의 참모이자,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수(張繡)의 모사로 활동하면서 조조의 군대를 두 번이나 대파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의 장남 조앙(曹昻)과 조카 조안민(曹安民), 호위 장수 전위(典韋)가 그의 계략에 휘말려 죽었다. 심지어 조조 역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조조가 그런 가후의 행적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절대 열세였던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누군가가 원소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약점을 알리는 일이 일어나자, 대부분 사람이 가후를 의심했지만, 조조만은 예외였다. 편지를 보지도 않고 불살라버렸다. 그만큼 가후의 능력을 높이 샀고,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가까이에 두고자 했다.


또한, 가후는 동탁과 이각의 폭정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동탁이 낙양에 갓 입성했을 때 그 휘하에는 고작 3천여 명의 병력밖에 없었다. 그런 동탁에게 야밤에 몰래 낙양을 빠져나간 뒤 낮에 다시 서량에서 북을 울리며 입성하게 하는 계책을 내놓은 이가 바로 가후였다. 또한, 동탁 사후 그의 무장이었던 이각과 곽사에게 왕윤(王允)과 맞서 싸우라고 조언한 것 역시 그로, 만일 가후가 아니었더라면 후한은 멸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가후의 또 다른 약점은 6명의 군주를 섬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그를 시기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가후는 자기 재능을 다른 이들이 시기하지 않도록 항상 말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자식의 혼인 역시 권세가와 맺지 않으며,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위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

가후는 사소한 원한조차 기억할 만큼 냉혹한 인물로 자신의 장수 중 한 명을 핍박하다가 죽이기도 했던 조비를 황제로 만들었을 만큼 담대했다. ⓒ 이미지 출처 - sohu.com


그런 가후가 조조 사후에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특히 조조의 셋째 아들 조비(曹丕)는 사소한 원한조차 기억할 만큼 냉혹한 인물로 가후를 매우 싫어했다. 실제로 그는 가후의 장수 중 하나를 여러 번 핍박하다가 죽이기도 했지만, 가후만은 끝까지 죽이지 않았다. 그런 조비를 황제로 만든 사람이 가후였다.  


어느 날, 조조가 조비와 조식 중 누가 낫겠냐고 물었다.
가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조조가 그 이유를 묻자, 가후가 말했다.
“잠시, 원소와 유표의 아들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 《삼국지》 권10 〈위서〉 ‘가후전’ 중에서


원소와 유표는 장자에게 권력을 계승하지 않아서 나중에 권력 다툼이 일어난 경우였다. 직설적인 표현 대신 침묵과 비유로 둘러댔지만, 가후의 말은 곧 권력은 장자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으로, 비록 조비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앞날을 생각하며 그의 편을 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비는 조조의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위나라를 창업한 문제(文帝, 사실 위나라의 첫 번째 황제지만, 아버지 조조를 초대 황제로 추존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죽고 말았다. 제위에 오른 지 6년만인 2265, 40세의 나이로 돌연 병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위나라에 있어 치명적인 일이었다.




제갈량을 뛰어넘는 《삼국지》 최고 전략가

조조는 적벽대전의 패배로 인해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두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 이미지 출처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역사를 보면 제때 진퇴를 결정하지 못해 개인은 물론 나라가 쇠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다.


알다시피, 적벽대전은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서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던 조조에 맞선 전투로 관도대전, 이릉대전과 함께 삼국지3대 전투로 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서기 2086, 원소와 그의 잔당을 모두 처리하고 승상이 된 조조는 9월에 형주를 점령한 후 강동마저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적벽대전의 시작이었다. 이때 누구도 조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가후만은 덕으로 다스리면 형주도, 손권도 결국 주공에게 머리 숙일 것이라며 유일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조조는 그의 조언을 무시하고, 100만 대군을 휘몰아쳐 강공을 펼쳤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만일 그때 조조가 가후의 말을 들었다면 죽기 전에 천하 통일을 달성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만큼 적벽대전은 조조에게 있어 천하 통일을 눈 앞에 두고 눈물을 삼켜야 했던 뼈아픈 패배였다.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은 그런 가후를 일개 군사 전략가로 철저히 격하시켰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가후의 출신 배경 때문이다. 가후가 태어난 서량(西涼)은 예부터 강()족과 흉노족의 고장이었다. 그러니 중화주의 사관에 젖은 나관중에게 가후는 오랑캐의 후예와도 같았다.


또한, 가후는 나관중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조조의 모사였다. 당연히 나관중은 가후는 철저히 낮추고, 실제로 없던 전투까지 만들어내면서 제갈량을 《삼국지》 최고 전략가로 신격화했. 하지만 제갈량은 관우나 장비, 조자룡처럼 무력이 뛰어난 장수도 아닐뿐더러 신산귀모(神算鬼謀, 뛰어난 계략과 귀신같은 꾀)의 능력을 지닌 책사도 아니었다. 전쟁보다는 내치에 치중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진수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지혜를 논하려고 하는 자는 가후에게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지를 보면 가후는 대부분 중요한 사건의 배후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그만큼 통찰력을 지닌 삼국지최고의 전략가였다.

 


6명의 군주를 섬긴 ‘처세의 달인’

가후는 한 명의 군주를 모시는 충성심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능력과 처세에 있어서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 이미지 출처 - new.qq.com


순욱이나 노숙이 명문가 출신으로 순탄한 삶을 살았다면, 변방 중의 변방 출신의 흙수저의 삶을 살아야 했던 가후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권력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했. 또한, 제갈량과 순욱 같은 이들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잡고 실천했다면, 가후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야 비로소 거기에 맞는 계책을 세웠다. 그만큼 피동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여느 책사들처럼 권력을 탐하고 누리기보다는 고개 숙이고 지냈다. 여섯 번이나 주군을 바꾸었다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며, 삼공(三公, 옛날 중국 조정에서 가장 높은 세 개의 관직) 중 하나인 태위(太尉, 지금의 국무총리급)까지 오르면서 7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런 가후를 가리켜서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후는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부정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진수 역시 가후의 그 점을 높이 평가하며, 순욱, 순유와 함께 조조의 가장 뛰어난 책사로 꼽았다.


가후는 오직 자기 능력만으로 난세를 헤쳐 나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난세에 살아남는 처세에서는 가후를 넘어설 만한 이는 없다. 비록 한 명의 군주를 모시는 충성심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능력과 처세에 있어서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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