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욱(荀彧) | 才
왕좌지재(王佐之才). ‘왕을 도울 만한 재능’이라는 뜻으로, ‘왕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울 능력을 지녔거나,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말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참모가 ‘왕좌지재’에 해당한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조조를 도와 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어 훗날 통일 제국 진(秦)의 토대가 된 위나라의 초석을 닦은 ‘순욱(荀彧)’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를 일컫는 데서 왕좌지재라는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옹(何顒)이 순욱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왕을 보필할 만한 재주를 가졌구나(王佐才也).”
― 《삼국지》 권10 〈위서〉 ‘순욱전’ 중에서
하옹의 자는 백구(伯求)로 사람을 감별하는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예컨대, 조조를 보고 “장차 한나라가 망하면 천하를 편안히 할 자는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순욱은 천하의 흐름을 정확히 읽을 줄 알았다. 실제로 그는 가족과 함께 기주(冀州)를 장악한 원소(袁紹)에게 먼저 갔지만, 그가 큰일을 이룰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그를 떠나 조조에게 귀의했다.
조조는 그런 순욱을 보며 “자방(子房)을 얻었다”라며 매우 기뻐했고, 순욱은 20여 년 동안 조조를 보좌하며 위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조조 곁에는 수많은 장수와 책사가 있었다. 특히 당대 최고의 인물 대부분이 조조 곁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조는 순욱을 가장 믿고 의지했다. 의심 많은 탓에 누구도 믿지 못했지만, 순욱만은 예외였다. 전쟁터를 전전하면서도 순욱에게만은 모든 일을 믿고 맡겼을 정도였다.
순욱은 뛰어난 지략과 담력을 겸비한 전략가로 《삼국지》 3대 대전으로 꼽히는 관도대전(官渡大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알다시피, 관도대전은 조조가 원소의 대군을 격파하면서 다른 군벌을 압도한 시작점이 된 전투였다. 그러니 조조에게 있어 관도대전의 승리를 이끈 순욱의 존재는 책사 이상이었다.
서기 200년, 조조와 원소는 칼끝을 서로에게 겨누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하는 운명이었다. 당시 누구도 원소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군사의 수만 100만 명에 육박할 만큼 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략이 뛰어난 조조마저 그와의 전면전을 두려워할 정도였다. 이때 순욱이 나섰다.
원소의 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원소는 군사는 많을지 모르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직을 받지 못한 군벌일 뿐입니다. 그에 비해 주공은 천자의 명을 받은 대장군으로 정치적 명분이 있습니다. 또한, 원소에게는 많은 사람이 모이지만, 그들을 등용하고 부리는 재주는 없습니다. 그에 비해 주공은 용맹과 지혜를 겸비했으며, 순리를 얻어 천하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원소와 싸우면 백전백승할 것입니다.
― 《삼국지》 권10 〈위서〉 ‘순욱전’ 중에서
서기 200년 10월, 조조와 원소는 결국 관도에서 칼끝을 서로 겨누었지만, 곧 지구전에 들어갔다. 먼저 고민에 빠진 이는 조조였다. 원소의 군대는 정예병만 10만여 명에 가까웠지만, 그의 군사는 고작 4만여 명뿐인 데다가 식량마저 바닥났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조조는 결국 후방에 있던 순욱에게 ‘이만, 돌아가겠노라’라며 편지를 보냈다.
군량은 점점 떨어지고, 군사들 역시 지쳐가고 있소. 더욱이 사방이 적에 둘러싸여 수개월째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처지니, 이만 허도로 철수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떤가 하오?
― 《삼국지》 권1 〈위서〉 ‘순욱전’ 중에서
하지만 순욱은 단호하게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장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계략, 도량, 무력, 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공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 원소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원소는 독단적이고, 부하를 믿지 않으니, 곧 그의 군대에 내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분발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삼국지》 권10 〈위서〉 ‘순욱전’ 중에서
전쟁의 승패는 장수의 의지에 좌우되는 만큼 더욱 강한 의지를 다지라는 말이었다. 이에 다시 분발한 조조는 원소의 모사 허유(許攸)가 배신한 틈을 노려 원소의 군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조조는 당대 최강자 원소를 꺾고 마침내 중원과 북방의 실질적인 맹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조조에게 순욱은 사돈을 맺어서라도 곁에 두고 싶은 인재였다. 이에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하고, 자신의 딸 안양공주를 순욱의 장남 순운(荀惲)과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순욱에게 있어서 조조는 한나라 부흥을 위해서 노력하는 동지일 뿐이었다.
조조와 순욱은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달랐다. 조조가 황제가 되어 천하를 직접 다스리려고 한 반면, 순욱은 한 황실의 부흥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조조와 순욱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순욱은 대의와 예,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자신을 낮추었고, 자리에 앉아서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또한, 생각을 함부로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모든 일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처리했다. 실례로, 재능이 뛰어난 조카가 있었지만, 어떤 일도 맡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순욱에게 물었다.
일을 처리할 때 조카와 상의하지 않고 왜 의랑(議郞, 낭관 중에서 지위가 비교적 높은 직책)과 함께 논의합니까?
그 말에 순욱이 웃으며 말했다.
관직이란 재능이 드러나야 출세하는 법이오. 만약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많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순욱의 공평하고, 공정한 마음은 이와 같았다.
― 《삼국지》 권10 〈위서〉 ‘순욱전’ 중에서
서기 212년, 동소(董昭)가 순욱을 찾았다. 동소는 문서 위조의 달인으로 권모술수에 능했다. 조조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한 것도 그였다. 동소는 순욱에게 조조를 구석(九錫, 천자가 공이 큰 신하나 황족에게 준 9가지 특전)을 누릴 수 있는 위 왕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순욱은 조조가 위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것은 물론 조조가 막내 조식(曹植)을 후계자로 선정하려고 했을 때도 적장자 원칙을 내세우며 조비(曹丕)에게로 원만한 승계를 주장했다. 그런 순욱이 조조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어느 날, 조조는 순욱에게 음식을 내렸다. 그런데 찬합이 모두 비어 있었다. 순욱이 그 뜻을 모를 리 없었다. 한마디로 “그대는 내게 빈 그릇과도 같은 존재이니, 그대가 알아서 해결하라”라는 것이었다. 조조의 마음을 안 순욱은 결국 자살로써 삶을 마감했다. 그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수많은 역사학자가 순욱을 조조의 최고 책사로 꼽는다. 곽가(郭嘉)나 사마의는 실리만 채웠을 뿐 명분을 살리지 못하였지만, 순욱은 명분과 실리 둘 다 취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가 패업을 이루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일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순욱은 조조의 건국을 반대한 한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었다. 그런 그의 높은 지조와 충성심은 동시대 사람은 물론 후대 사람으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마의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전하는 오랜 일들을 나는 눈앞에서 직접 보고, 들었다. 백수십 년 동안 순령군(荀令君, 순욱)보다 뛰어난 이는 절대 없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 역시 “조조의 모사 중 순욱이 가장 뛰어나다”라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풍격, 선견지명을 갖추었지만, 뜻을 달성하는 것에는 뛰어나지 못했다.
― 《삼국지》 권10 〈위서〉 ‘순욱전’ 중에서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죽어서도 그 이름이 남으니 절대 정도(正道)에서 어긋나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순욱은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지만,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고 우러러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