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가는 길목에 샐러드 가게가 하나 있는데, 저녁을 해먹기 귀찮은 날이면 으레 그곳을 지나치지 못하고 꼭 들려선 저녁 대용 샐러드를 사가곤 한다. 퇴근하는 길에 들리다 보니 매번 비슷한 시간대에 방문한다. 희한하게도 그 시간대에 가면 가게에 손님이 나 혼자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사장님은 환하게 인사를 건네신 후 카운터 뒤편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으신다. 혼자 온 손님이 부담스럽지 않게, 천천히 메뉴를 고를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그녀의 사소한 배려가 좋아 단골이 되었다. 그날도 샐러드 도시락이 가지런히 정리된 냉장고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하나를 집어 들고는 카운터로 향했다.
사장님은 읽던 책을 뒤집어 둔 채 포스기에 메뉴를 찍으며 말을 거셨다. 오늘은 운동 가세요? 요즘도 야근 많으세요? 날이 많이 덥죠? 이런 안부인사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참깨 들어간 드레싱 좋아하시죠?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질문 하나가 더 날아왔다. 고구마 들어간 거 좋아하시고, 새우는 별로 안 좋아하시구요, 그쵸? 사장님은 관찰기를 당사자에게 보고한 게 부끄러우셨는지 질문을 하시곤 멋쩍게 웃으셨다. 어떻게 아셨냐고 물으니 매번 사가는 샐러드가 비슷했다고 하시면서, 취향이 확실해서 파악하기 쉬웠다고 하셨다. 사장님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시더니 작은 용기에 샐러드를 담아 오셨다. 새우 샐러드인데 드레싱이 달라요, 이건 아마 입에 맞으실 거에요, 이게 손님의 새로운 취향이 될 수도 있겠네요. 엿들을 사람도 없는데 사장님은 목소리를 낮추시며 ‘이건 단골이니까 서비스’라고 덧붙이시며 웃으셨다. 나도 몰랐던 나의 샐러드 취향을 알게 된 날이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의 취향이 간파 당하는 일은 그 뒤로 몇 번 더 일어났다. 자주 가는 카페에 가서 시럽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주문했더니 인사하고 지내는 바리스타 분이 “이거 주문하시는 거 보니 오늘이 월요일이 맞네요”라며 안부인사를 대신하셨다. 단골 과일가게에 갔더니 사장님이 “9월 되면 패션후르츠 찾으시겠네요, 입고되면 문자 넣어드릴게요”라며 끝인사를 건네셨다. 레몬 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출근했더니 “웬일로 밝은 색 옷을 입었네요”라고 말을 듣기도 했다. 친구가 “야 이건 KTX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네 취향이다”라며 보내준 사진 속 제품은 실제로 내가 사려고 장바구니에 담아둔 옷이었다. 늦은 밤 동생이 “이거 들어봐, 언니 취향일 거 같아”라며 알려준 음악은 정말로 내 취향을 저격했고 한동안 그 노래만 들었다.
뭐야 이 사람들. 왜 다들 내 취향을 알고 있는거야.
돌이켜보니 이렇게 남들도 쉽게 알아차릴 정도로 확고한 나의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참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누가 취향에 대해 물으면 당황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몇 가지 정도는 바로 말할 수 있게끔 말이다. 스스로의 취향에 대해 아주 짧은 고찰을 해보니, 언젠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 취향이요? 제 취향은 이렇습니다. 평소에는 시럽 없는 커피를 마시지만 월요일에는 항상 시럽이 잔뜩 들어간 단 커피를 마십니다. 가을이 되면 패션후르츠를 찾습니다. 아, 샐러드엔 새우보다는 불고기나 치킨 같은 고기 토핑이 들어간 걸 좋아해요. 원색 계열 옷을 싫어하고, 패턴 없는 무채색 옷을 좋아해서 옷장이 좀 칙칙한 편입니다. 여름에도 반바지보다는 긴팔, 긴바지를 선호하고요. 좋아하는 펜의 굵기는 0.38mm입니다. 반지는 항상 오른손 검지에만 끼고요, 안 끼면 불안해집니다. 술 마신 다음 날 햄버거로 해장하는 걸 좋아합니다. 기타 반주가 들어간 노래를 특히 좋아합니다. 박물관보다는 미술관, 현대미술보다는 고전미술이 좋습니다. 아침보다는 저녁이 좋고, 특히 노을 지는 토요일 이른 저녁 시간대를 가장 좋아합니다…..”
생각보다 내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았다. 언젠가 스치듯 ‘자신의 취향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취향은 그저 단순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왜 글쓴이가 그리 말했는지 이제 이해가 됐다. 취향에 대한 짧은 고찰의 결론은, 취향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물건, 어떤 상황, 어떤 순간을 좋아하고 선호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음식을 먹으면 어떤 기분이 들어 좋다거나, 이 노래를 들으면 어떤 추억이 떠올라 좋다거나, 어떤 분위기의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어 이런 옷을 입고 싶다거나 등등. 그런 이유들을 토대로 내가 하나씩 선택해온 것들이 모여 취향이 되었다. 결국 취향은 “지금까지의 나” 그 자체였다. 그래서 자신의 취향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 앞으로 어떤 “나”로 살아갈 지 고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취향은 계속 바뀐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처한 환경이나 상황,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나 잊지 못할 추억 등에 따라 좋아했던 것이 싫어지기도, 싫었던 것이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대해 생각해보고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여야 할테니까. 이것이 샐러드 도시락에서 시작된 나의 <취향에 대한 아주 짧은 고찰>의 결론이다.
“나는 누구인가 평생 물어온 질문
아마 평생 정답을 찾지 못할 그 질문
나란 놈을 고작 말 몇 개로 답할 수 있었다면
신께서 그 수많은 아름다움을
다 만드시진 않았겠지”
- 방탄소년단 <Intro: Perso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