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지 항상 떨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을
이 시 속의 말하는 이는 70년 뒤 내가 죽은 후 장례식장에 찾아온 이들을 보며 말하는 나 자신이며 시인은 미래의 나의 죽음과 장례식장에 모습을 상상하는 18살 현재의 나이다.
70년 뒤 나는 먹을 대로 나이를 먹은 88세로 장례식장에 찾아온 이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의 장례식장에는 친구들, 지인, 가족들이 찾아와 주었다. 그 장례식장을 나는 죽은 뒤 사람들이 흔히 말하곤 하는 귀신같은 존재가 되어서 지켜보고 있다. 장례식장에 모습에는 친구들, 지인, 가족들이 (형, 자식, 아내) 모두 나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들을 세상을 먼저 떠나간 나의 부모님과 함께 바라보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내 88년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짧을 수 있고 또한 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은 내 88년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만족하며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장례식장에 찾아와 준 모든 이들이 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딱 오늘까지만 느꼈으면 좋겠다. 물론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나도 생전에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나보다 먼저 떠났었고 그때의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기에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장례식장을 찾아온 모든 이들이 그만 슬퍼했으면 좋겠다. 아까 위에 글에서 말했듯이 나는 내 삶을 만족하고 즐겁게 살았으므로 이들이 나와의 좋았던 추억 기억 기분을 느끼고 회상하며 슬퍼하더라도 오늘 하루만 만약 더 슬퍼하고 싶더라면 많아도 1년에 한 번 나의 기일에만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윤동주 시인에 무서운 시간이라는 시속에서 ‘나 아직 여기에 호흡이 남아있소’라는 시구가 있는데 마치 내가 나의 죽음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현하는 거 같았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만족스럽고 즐거운,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미련이 남아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나는 내가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닌 나이를 먹으며 병들고 자연스럽게 떠난 것이므로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또 아직 책임지고 챙겨야 할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있다. 그래서 ‘나 아직 여기에 호흡이 남아있소’라는 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 적응되지 않았고 아직 더 살고 싶다는 미련이 남은 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시 마지막에 ‘나를 부르지 마오’라는 시구가 있는데 이것은 장례식장을 찾아온 모든 이들이 나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던 거처럼 나를 찾지 않고 평소대로 살아가라는 나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느껴졌다.
이 시를 쓴 윤동주 시인이 살던 시대는 일제강점기 시대로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라는 부분은 아마 일제강점기 시대의 영향으로 윤동주 시인에게 앞으로 다가오는 죽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저 말을 하는 것이 상상이 됐다. 이런 상황이 마치 나의 주제에 맞게 상상해보면 내가 나이가 들어 죽게 되고 영혼, 귀신이라는 존재로 의식을 되찾을 때 나를 깨우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윤동주 시인의 감정과 나의 주제에 맞추어 계속 상상하며 시를 계속 읽다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시의 ‘무서운 시간’이라는 제목이 윤동주 시인에 삶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지 항상 떨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 상상되면서 과거의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인해서 오늘을 살아오고 있는 나의 하루는 어떤지 또 죽었을 때 감정이 어떨지 많이 고민할 시간을 준 시인 것 같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다. 사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아직 18살이라 어려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시 속의 88세로 죽음을 경험한 그때의 나도 잘 모르지 않을까 싶다.
나는 18살인 지금 주변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 내가 태어나시자마자 돌아가셔서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친할아버지, 화재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친구, 가족같이 여기며 키웠던 애완동물 등 죽음들을 수없이 경험했지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잘 믿기지 않는다. 심심할 때 메시지나 연락만 해도 나와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더욱더 아무렇지 않게 항상 내 주변에 있던 사람이 떠난다면, 묵묵히 나를 지켜주고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물론 슬프고 눈물도 나고 울분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상 물론 슬프긴 하지만 막상 믿기지 않아서 정신 나가는듯한 상태가 되어 버리곤 한다.
이전에 경험을 해본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감정을 처음 느끼는 이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지 걱정되기도 하고 누군가가 나타나서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맞이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번 같은 얘기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이다. 나는 나의 장례식장을 찾아온 모든 이들이 슬퍼할 수는 있어도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계속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이들이나 나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노래가 있다. 내 생각에 이 노래 때문의 우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위로가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한 번 추천해본다.
첫 번째 노래는 뮤지컬 서편제의 넘버로 차지연 배우님이 부른 ‘살다 보면’이라는 곡이다. 서편제 넘버중 가장 유명한 곡이기도 하며 위로가 되는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그저 살다 보면 사라진다’라는 가사가 반복되는데 노래 속에서 주인공이 힘든 일상 속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렸을 적 항상 말해주시던 ‘그저 살다 보면 사라진다’라는 말이 생각나 그 말을 반복하며 위로받는 내용이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이들이 나를 찾을 때 내가 해주고 싶은 말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에게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긴다면 꼭 생기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혼자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꼭 이 노래를 소개해 줘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곡을 들으면서 슬픈 맘을 위로받고 아무렇지 않게 잘 이겨내서 꿋꿋이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추천 해봤다.
두 번째 노래는 대중들이 잘 알고 유명한 노래이다. 김광석 가수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라는 곡인데 제목으로도 눈치챌 수 있듯이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 하는듯한 가사로 슬픈 느낌을 주는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이 곡 또한 역시 나의 죽음으로 인해서 삶이 힘들고 슬픈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이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이라는 가사가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잊지 못해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둘려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나 때문에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면 차라리 잊고 지내라는 메시지도 전달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장례식장을 찾아온 이들이 아닌 죽음을 맞이한 88세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 중식이라는 가수의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인데 내가 글을 쓰는 현시점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며 내가 힘들 때 위로받던 노래이기도 하다. 가사를 보면 굉장히 자신감을 가지게 해주는 느낌을 주며 나 자신을 더욱더 아끼고 사랑하게 해주는 듯한 기분도 든다. 그중에서 한 소절의 가사가 생각난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라는 가사인데 삶을 마무리하는 나에게 수고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좋아하는 노래인 만큼 죽은 시점에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느낌이 어떨지 또 감정은 어따ᅠ갈지 궁금한 점도 생겨서 추천해봤다.
출처: https://howahha.tistory.com/entry/너무-슬퍼하지-말고-아무-일도-없던-거처럼 [프리라이팅-명예의전당: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