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납'과 '인정'의 크나큰 간극을 응시하는 것.
요즘 부쩍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은 없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20대 초반에 만났던 소개팅 상대에게 '친누나와 절연했다'라는 말을 듣고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내가, 가족 중 한 사람과 절연하게 되었을 때 그를 떠올렸다. 그가 절연한 건 부정한 것이고, 나의 절연은 옳은 것이라 생각하는 이른바 '내로남불'의 태도를 취한 채로 말이다. 그 카오스를 겪고 한참 뒤, 삶의 방면에서 게으른 사람을 염오 하던 내가 기어코 노력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게으른 사람들을 용납할 수 있었다. 이 역시 석연치 않은 용납이었는지, 아니면 노력하지 못했던 내 처지를 합리화하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ebs 캐릭터 펭수의 좌시할 수 없는 논란에도 여전히 펭수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꺼리곤 했는데, 펭수 세계관을 정립한 이슬예나 피디의 괄목할만한 성과만큼은 결코 묵과할 수 없었기에 혼란을 느꼈다. 이와 같이 역지사지로 얻은 교훈과 자가당착적인 수긍들은 단 하나의 단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단어는 "부분적인 인정"이었다. 그 단어를 어떻게 더욱 적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사전을 뒤졌다. 그리고 발견한 단어들을 나열해보았다. "용납/수긍/인정/이해", 이 단어들의 뜻을 종이에 적어두고나서야 과거 아노미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근원은 바로 "용납과 인정의 크나큰 간극"이었다.
이 간극에 관해 언급하려면 우선 '용납'과 '인정'의 정의를 살펴보아야 옳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용납
1.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2.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
인정
1. 명사 확실히 그렇다고 여김.
2. 명사 법률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가 어떤 사실의 존재 여부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
용납과 인정은 의미 차원에서 확연히 다른 단어이다. 용납은 호불호의 판단을 수반하지 않는 납득이며, 인정은 말 그대로 동의 하에 온전히 수긍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용납은 동의 없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황 그 자체를 수긍할 수 있는 이해의 한 형태이고, 인정은 확신과 동의로 점철된 수긍이다.
나는 용납/수긍/인정/이해를 한 덩이로 보고 그것들의 차이를 감각해보지 않은 채 20대의 초중반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편에 의구심을 품어보고, 수긍하는 척 경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어느 순간 용납과 인정의 간극을 발견했다. 돌이켜보니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은 없었다. 이 비대한 용납은 무려 페미니즘을 체화하자마자 변해버린 여자 친구와 아내에게 낯섦을 느끼는 일부 남성들까지 품을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으려 게으름 피우는 일에는 여전히 아니꼽지만 말이다. 고개는 주억거리지만 마음은 갸우뚱한 상태가 계속되면서 용납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졌다. 아직 이 현상이 나의 지경을 넓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에 회의적이면서도 그들에게 편입해서 인간애를 구축하려는 비굴한 한 인간의 초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용납의 비대함을 응시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용납과 인정을 구분 짓는 것은 꼭 필요했다. 나는 당신의 그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용납'할 수 있지만 '인정'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이 필요한 순간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의아한 과거를 파고들어서 그 간극을 만끽하고 나니, 형용할 수 없는 혼란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혼란의 날들은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려 애썼기 때문에 계속되던 것이었다. 이제는 그 간극을 세밀하게 감각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호오(好惡)를 구분 짓게 하고 내 강건한 삶을 살찌우며 충만하게 한다, 라는 확신이 샘솟는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용납과 인정을 구분 짓고 어떤 태도를 취할지 고민하는 것은 삶을 꽤 즐겁게 만든다. 이제부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산란한 마음을 내려놓고 자애로운 선택지 '용납'을 선택해보기로 했다. '용납'은 자타를 아우르는 몹시 근사한 선택지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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