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귀엽고 통통했던 친구는 '구제역'이라고 놀림받았다. 어른들은 범죄자나 패륜아에게 '금수보다 못한 놈'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언감생심 한국인 앞에서 동물권을 운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원체 입이 짧아서 못 먹는 음식이 많다. 삭힌 음식을 일체 먹지 못하고, 밥도둑 간장게장은 밥경찰이다. 만성 비염으로 냄새를 잘 못 맡아도 소고기의 누릿한 냄새와 닭고기의 비린내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려서, 웬만한 고기 맛을 모른다. 그나마 먹을 수 있었던 돼지고기 역시 즐기는 편은 아니었고, 갑각류, 패류는 뭉클뭉클한 식감에 대비되는 딱딱한 껍데기 때문에 먹지 못한다. 학부 때 해부학 실습을 다녀온 이후로 고깃덩어리를 보면 실습실에서 보았던 시체의 근육이 떠오른다. 잔멸치 수십 마리를 밥 위에 얹어 맛있게 먹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새우를 젓갈로 담가 몇백 마리씩 털어 넣고 버무리는 김장김치를 보는 건 고역이다.
내 주위에는 식도락가가 많다. 개고기를 '힘나는 고기'로 속여서 어린 나이부터 나를 기만했던 아빠, 생각할수록 분하고 헛구역질이 난다. 개고기가 정말 힘나는 고기였다면, 20년도 더 된 지금의 내가 비실이로 통칭되는 건 누가 설명해줄 것인가. 미식가로 자리매김한 이모부가 고기 먹을 줄 모른다며 핀잔 주는 건 일상이다. 그런데 식도락가만큼이나 나를 비건이게 할 선생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다. 함께 사는 고양이 두 마리를 보며 "치킨 먹을 때마다 뼤슈 다리가 생각나"라고 말하는 엄마, 스쳐 지나가다 본 축산업의 민낯을 다룬 다큐멘터리, 언뜻언뜻 떠올라 지우기 힘든 동물권의 불합리한 귀천. 할아버지와 정다운 눈빛을 주고받던 흑염소와 황소는 깜둥이와 누렁이로 칭한다. 그러나 그 순진한 동물은 자기의 별칭이 '아들, 손자 대학 등록금'이라는 걸 까맣게 모른다. 훠궈에 빠지기 싫어 손수 집게발을 잘라 내놓는 가재를, 건강을 위한답시고 각종 동물로 술을 담그는 노년층의 모습을 보며 미뤄뒀던 비건 식이를 떠올린다.
게으른 탓이다. 허약 체질에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서 고기를 먹으면 힘이 날 거라는 한국인의 도모에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다. 손을 뻗으면 채소나 과일보다 유제품과 생선에 가까워서 더 뻗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일상에 매몰된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불편한 진실을 기반으로 행동할 차례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던 그것을 직면해야만 한다. 원래 혀에 쉬이 현혹되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욱 강고해져야 한다. 이제는 비건이다. 치즈와 우유를 포기하지 못해서, 매콤한 낙지볶음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감을 놓을 수 없어서 선택했던 페스코 베지테리언은 구실 좋은 변명일 뿐이다. 비인간적인 행태로 만들어진 소의 젖을, 연체동물의 통각을 잊어선 안 된다. 어떤 불합리로 변모해서 내게 삼켜지는지 기억해야 한다. 인습적인 부조리를 끊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끊길 허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