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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혜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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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쓰다 Dec 12. 2019

미완성의 소설은 그대로 그렇게.

창작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도망치는 법.

 

<마지못해 사는 인간의 삶은 마치 검은색 목도리를 짜던 중에 방바닥을 나뒹굴던 흰색 실 하나가 함께 직조되는 것과 같다. 그런 예견치 못한 상황에서 한참을 얼버무리다가, 마침내 잘못 짜인 목도리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것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을 때라야 비로소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불행으로부터 휴식을 만끽하는 그만의 방법인 건지도 모르겠다. 은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혼하려 하는 엄마와 아빠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린 나이에 누구와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으며, 오래 만난 연인이 은한과 함께 아는 사람들과 공모해서 그를 배반했을 때도 은한은 삶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 종일 책을 붙잡고 앉아있어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작가가 만든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대다 보면 은한의 특장인 ‘도피의 삶’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 오붓한 시간들이 그에겐 그 무엇보다 귀중했다. 그를 갉아먹으려 달려드는 굶주린 천장이 서서히 옥죄여오는 걸 또렷하게 직면하면서, 은한은 완전히 틀려먹어 화가 치밀었던 책을 떠올렸다. 그 책은 완전하게 틀렸어, 은한은 수음했다. 이 순간에 드는 모든 감정마저 책으로 치환하다니, 그는 자신의 삶이 우습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모든 걸 견딜 수 없는 나날이 연속되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훔치면서 그 머리카락만이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느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때의 그는 오래된 고양이의 늘어진 뱃살을 만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만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은한이고 은한이 모든 것이 되는 순간에는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우울을 듣는 게 힘들었던 순간에 특히 그랬다. 오래된 친구가 대청소하듯 은한을 쓸어 내다 버릴 때까지 그는 친구의 우울을 모두 흡수했다. 고독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진실이 곧 정의라고 착각했다. 진심을 드러내는 일이 모두 선의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아주 성급한 판단을 했다. 우울을 상대에게 털어버리는 것이 가끔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위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은한이 모든 걸 받아줄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 친구는 은한이 침몰하는 줄도 모르고-어쩌면 알고 싶지도 않았겠지- 연신 은한의 가슴에 추를 얹었다. 마침내 은한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는 그들의 오랜 우정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포클레인이 되었다. 나도 울적하니까 제발 그만하라는 그 말. 그 한마디가 각자의 삶에서 되뇌어졌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침묵의 영역으로 밀려난 그들은 그저 그 상황을 가만히 들여다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게 재미없는 시기가 이어졌다. 은한은 몇 번이고 돌려보았던 다큐멘터리를 틀어놓고 지구의 어딘가에서 오로지 생(生)을 이유로 살아야 할, 내일 먹을 물을 걱정해야 할 어느 이름 모를 부족의 삶을 천천히 감각했다. 밀린 빨래처럼 축축 늘어져만가는 일상이 조금씩 가벼워질 때쯤 그는 그와 닮은 책 한 권을 꺼내 읽었다. 전혀 떠오르지 않는 골자를 짚어내고 자신과 닮아서 슬펐던 인물을 기어이 끌어냈다. 이삼일에 한 번은 꼭 써보겠다고 다짐했던 글쓰기마저 따분해지고, 은한은 나라는 인간은 어째서 부족한 솜씨로도 글을 쓰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옛 애인처럼 질척거리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비로소 후련함이 찾아왔다. 깜깜한 글감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걸 느낀 순간 은한은 키보드를 연신 눌러댔다.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쉼표를 지우는 일이었다. 만연체를 사모했던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쉼표의 그 하릴없는 여유로움을 덜어냈다. 은한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쉼표들을 하나씩 지우며 문장을 정돈했다. 그렇게 우울한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책을 노려보다가 이내 화해하고 다 읽어버리는, 그리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치유되었다. 글쓰기와 해소의 접점이 이토록 선명할 줄이야. 형편없는 글솜씨로도 어쩌면 조금 더 괜찮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에, 바로 그날에 그는 훈을 만났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은한은 나 자신이면서도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삶을 그리는 데 내 글솜씨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그 밖의 이유도 많았다. 나름 다사다난한 연애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리고자 하는 연인 간의 사랑(하루 종일 말없이 각자의 업무에만 충실해도 은근한 설렘이 있는 편한 연인 간의 사랑)은 겪어보지 못한 사랑이었다. 훈을 만나 은한의 인생이 풍부해지는 것도 내 신념과 들어맞지 않았지만 말이다. 조금 울적한 여자 주인공에게 나타난 평범한 남자 주인공과의 관계성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 이대로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미완성으로 풀어둔다. 꿈속이든 현실에서든 은한과 훈이 떠오르면 더 이어갈 수도 있겠지, 무책임한 소망을 덧붙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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