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에세이
유비
나는 주변에서 일기 쓰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일기를 쓰는 그들은 언젠가 위인이 될지 모른다. 나는 무언가라도 쓰는 사람들은 응원하는데, 차라리 일기 쓰는 사람들이 주변인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큰 성공을 하거나 정말로 위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약에라도 일기 쓰는 사람들이 어중간한 사람들끼리 비교당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로 행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이 원하는 이상에 다가가기보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사건이다. 누군가 일기를 한 번이라도 써봤다면 일기를 쓰는 행동은 누구에게나 적잖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사 일기’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도 있으며, 7월 베스트 셀러 <더 해빙>의 이서윤 작가님께서 말한 ‘해빙 일기’*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해빙 일기란 어떤 것이든 내가 얻은 것 (I Have) 과 내가 느낀 것 (I Feel)을 쓰는 것이다.
일기 앞에 어떤 단어든 붙이기 나름이지만 모든 종류의 일기는 저마다 많은 사례를 동반한다. 개그우먼 장도연 씨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일기를 쓴다고 예능에서 말했다. 가수 아이유 씨도 일기를 쓰는데 그 일기가 자신의 음악적 원천이라고 했을 만큼 일기의 역할과 기능은 무궁무진하다. 아무리 일기가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기록할 뿐인 것으로 단순하게 정의될지라도, 일기는 시간이 많이 지나 장제스의 일기*처럼 미래에 역사의 연구 방향을 완전히 뒤바꿀 역사적 사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숨기지 못한 일기가 새로 만난 연인과의 관계를 뒤엎을 불상사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느 쪽이든 일기가 큰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같다.
*2차 세계대전 항일전을 이끈 장재석(장제스)의 일기가 2000년에 공개된 후 중국의 근현대사 역사 연구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뀐 사례가 있다.
유튜브에서 장도연 씨의 일기를 봤는데 신기할 만큼이나 악필이었다. 나는 그런 유명인의 악필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역시나 (글은) 예쁜 것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글씨의 모습이 아니라 글의 내용 때문이다. 일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장도연이라는 한 사람은 아름다운 글보다도 더 아름답다. 미래에 역사적 사료를 보태기 위해 일기 한 장을 더 쓰기보다 현재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기를 쓴다면, 일기는 그것으로 그 이상의 가치가 된 것이다. 일기의 가치를 실현하면 자연스럽게 현재의 나를 잘 보살필 수 있게 된다. 지금의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미래의 나를 위해 앞만 보고 뛰어가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결국 잃게 되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을 포기하는 멍청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내 몸보다 귀중한 전세 대출, 카드 할부, 자동차, 음식, 옷, 여행 때문에 우리는 멍청하게 남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현재의 나를 챙길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종이와 펜을 꺼내 그 글이 악필일지라도 일기를 써보는 것이다.
나는 악필이다. 사실 ‘누가 나보다 더 악필이더라’와 같은 말은 내가 악필이라는 것을 주변에 한 번 더 알려줄 뿐인 바보 같은 행동이지만, 어쨌든 나는 장도연 씨보다 더 악필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내 글씨를 보고 “글씨 존X 못쓰네.” 라며 낄낄댔다. 나는 그 비난에 상처받지 않았다. 내 글씨는 진짜 악필이었다. 그러다 글씨를 고치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 5번 정도 악필을 고치기 위해 시도했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사업을 하시는데, 어머님께서는 줄곧 “유비야, 너는 큰 사람이 될 거기 때문에 지금부터 글씨를 연습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하게도 나는 어머님의 조언을 잔소리로 듣지 않았다. 나는 자기계발을 좋아한다. 그래서 글씨 교정 책들을 몇 권 샀다. 최재만 선생님의 <악필 교정의 정석>. 그 촌스러운 노란 표지에는 실패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충분한 신뢰감이 담겨있었다. 촌스러운 표지의 글씨 교정 책은 분명히 한 달이면 끝났어야 했는데 나는 그 책을 이런저런 게으른 핑계로 몇 년이 걸려서야 겨우 다 썼다. 심지어 그 책 외에 다른 글씨 교정 책들은 쓰다 안 쓰다 결국 지금까지도 다 쓰지 못했다.
촌스러운 노란색 악필 교정 책을 쓰다가 나는 내 안의 게으름을 발견했다. (나는 원래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에 내 속의 게으름을 발견했을 뿐이다) 나는 나의 게으름을 통해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비극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내가 악필 교정 서적을 그렇게 게을리 썼음에도 내 글씨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악필이 악필로 보이는 이유는 모든 글씨의 크기나 선의 방향이 제각각이어서다. 악필 교정 책 하나를 다 쓴 후, 제각각이던 나의 글씨는 일정하게 못생긴 글씨로 변했다. 그래서 짧게 쓰면 악필인데 길게 모아놓으면 그럴싸해 보인다. 나는 이런 결과가 만족스럽고 뿌듯하다. 나는 그 후로 누군가의 ‘게으른 노력’도 노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저 게으른 것과 게으르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것은 다르다. 고이는 것과 흐르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패션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사수에게 딱 4일간 인수인계를 받았는데, 선배가 회사를 떠날 때 나에게 “너 글씨 되게 잘 쓰네.”라는 말은 남겼다. 학교에서는 동물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배웠는데, 아무튼 나는 그 선배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선배의 칭찬이 내 게으른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 일이 게으른 노력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될 만한 성취라고 느껴졌다. 여전히 예쁜 글씨는 못 쓰지만 “글씨 잘 쓰네?”와 같은 말을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스스로 악필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악필이 악필로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글을 짧게 쓰지 않는 것이다. 못생긴 글씨도 가지런히 모여 있으면 예뻐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게을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글씨를 정말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면 좋을 것 같은 그런 마음. 흔히, 천재들은 악필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제 악필도, 천재도 아니다. 시간이야 얼마나 걸렸든 나는 그렇게 악필 교정 책 한 권으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라는 말을 무시했던 철없는 시절을 지나, ‘평범하게’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대부분의 어른이 평범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고, 울고 웃으며 하루를 지낸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을 모를 것이다. 평범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그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과 같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지런한 글씨가 되는 과정과 같다. 더불어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나 평범한 인생 모두 소중하고 귀한 인생이고 우리는 그 인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반면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그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나는 비교적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점차 평범해지고 있다. 평범한 삶에 가까워지며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나의 행복도와 자존감을 결정 짓는 건 남들에게 보이는 내 인생의 모습이 아니고 내가 내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라는 거다. 나는 나의 인생을 좋아했다. 싫어했다를 반복하다 지금이 되었다. 그러다 사람은 태어난 환경을 넘어 변화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바로 ‘게으른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수많은 게으른 노력이 내 인생 속에 머물렀다. 나의 악필이 볼만한 악필로 변한 것처럼 우리의 일기들도 봐줄 만한 일기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의 인생도 글씨처럼 가지런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본 에세이는 독자님의 관심을 받아 쓴 글입니다.
남은 하루, 한 편의 글로 영감을 얻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