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0. 숙제

by 타르시아 Mar 11. 2025

알림장에 삐뚤빼뚤 적힌 글자와 숫자들, 교과서 한 모퉁이를 접어놓아 몇 쪽부터 몇 쪽까지인지를 표시해놓았던 흔적들, 숙제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숙제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닐 것이다. 고단했던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놀며 달콤한 오후를 보내고 저녁이 시작되기 전에 하는 텔레비전 만화영화도 봐야 하는데 숙제는 그 모든 즐거운 활동의 방해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숙제를 열심히 했다. 숙제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는 ’숙제했니?‘ 라는 말에 자신있게 ‘네.‘ 라는 말로 대답해서 그에 대해 더이상 다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 하나는 그렇게 숙제를 해놓아야 편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만화영화와 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지는 않은 일이지만 ‘해야 하는 일‘ 을 하지 않고 계속 놔두고 있는 것은 어린 마음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엇을 풀어라, 무엇을 써와라.‘ 라는 숙제는 내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가장 힘든 숙제는 ‘무엇을 만들어 와라.‘ 였다. 그림도 못 그리고 손동작을 포함한 모든 동작들이 다 느리고 둔한 나에게는 무엇을 만드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바람개비도 제대로 만들지 못해 아버지에게 혼이 나기도 했고 고무동력기도 재료는 사 왔지만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반나절 내내 그 재료들을 바라보다 울기만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들이 쉽게 하는 숙제를 너무나 못했기에 나는 나에 대해 언제나 회의감이 들었다.


다행히 중학교 때부터 무엇을 만들어 오는 숙제의 양은 좀 줄어들었다. 때로 그러한 숙제들이 나를 괴롭히긴 했지만 초등학교 때처럼 울거나 멍하니 있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렇게나 만들어갔을 뿐이었다.  그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내 숙제의 결과’ 를 보며 선생님은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그 어쩔 수 없음‘ 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결과물이 내 성적표에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성적으로 돌아왔다. 남들이 쉽게 하는 것을 못해 전체 성적이 깎이고 석차가 떨어지는 것이 괴로웠다.


고등학교가 되자 학교 숙제는 그저 일종의 ‘부수적인 것’ 이었다. 물론 몇몇 숙제들은 수행평가 점수에 반영이 되었고 수시로 대학을 갈 학생들에게는 내신 성적도 중요했지만 결국 고등학생의 지상 목표는 ‘수능 고득점‘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운데서 독후감만큼은 열심히 썼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국어 숙제는 교과서에 실린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 를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쓰는 것‘ 은 내게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기에 나는 별생각없이 교과서를 읽고 국어 공책에 독후감을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며칠 후, 국어 선생님은 모두가 제출했던 국어 공책을 다 돌려주시고 나서 잘 쓴 독후감이 있으니 같이 읽고 나눠보자는 이야기를 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교탁 앞에 나와 내가 쓴 독후감을 읽으라고 말하셨다. 그 당시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해 매일 괴로운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같은 반 안의 어느 누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낯설었다. 그런 반 친구들을 바라보며 내가 쓴 글을 읽는다는 것이 부끄럽고 떨렸다. 나는 공책을 잡고 누구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공책에 눈을 박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쓴 글을 읽어갔다. 그 떨림에는 부끄러움도 섞여있었지만 내가 그래도 누군가의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도 같이 섞여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국어 숙제, 독후감 숙제만큼은 열과 성을 다했다. 학년이 바뀌고 선생님이 바뀐 후에도.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열심히 했던 숙제는 대학교 교양과목의 숙제였다. (대학교에서는 ’숙제’ 보다는 ‘과제’ 라는 이름을 썼지만.) 1학년 1학기, 중국문학 관련 교양과목의 과제는 자신이 관심을 가진 작품과 문인에 대해 리포트를 쓰는 것이었다. 그 제출 과제를 위해 나는 공강 시간에도 교보문고나 종로서적에 가서 참고 도서가 될만한 걸 찾아보았고 (그것 때문에 전공과목 수업에 지각할 뻔하기도 했다.) 대학원 도서관까지 가서 잘 읽지도 못할 대만에서 나온 책까지 빌리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공책에 리포트 초고를 썼다. 온 힘을 다해 쓴 리포트는 한글 10포인트로 썼는데도 A4 10쪽을 훌쩍 넘어갔다. 내가 중국문학과 한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한 작품과 문인에 대해 쓰는 리포트라 허투루 쓸 수 없다는 마음에서 쓴 리포트였기에 그 리포트에 대해 어떤 성적을 받을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불행히도 그 당시 쓰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려 하드디스크 포맷을 하는 바람에 그 컴퓨터에 저장했던 모든 자료가 날아가 그 리포트는 영영 사라졌지만 그것을 쓰는 과정 자체가 보람차고 행복했기에 그 과제는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숙제나 과제와 조금 먼 삶을 살았다. 물론 중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어학당에서 숙제를 내주었지만 그것은 내게 ’강제적‘ 인 것은 아니었다. 교환학생이나 학점을 인정받으러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에게는 수료 점수와 수료 여부가 중요했지만 나는 그런 목적으로 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서 내주는 숙제는 대부분 다 해갔지만 정규학교에서 내주는 것처럼 강제적인 성격이 없었기에 나는 숙제를 하면서도 그것을 숙제라기보다는 중국어 공부라고 생각하면서 했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첫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했던 숙제는 진짜 숙제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직장에서 주어지는 숙제에는 엄격한 시간 제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숙제는 단순한 ’성적‘ 이 아닌 ‘사회적 책임과 나의 사회인으로서의 명예‘가 달려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처음에는 너무나 무겁고 괴롭게 느껴졌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무게를 짊어지는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나는 조금씩 타성에 젖어갔다. 이것이 나의 숙제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처리해야 하는 일‘ 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부서가 바뀌고 나서 매일 몇십 명 또는 백 명의 이상의 사람을 대하게 되자 그 생각은 더 커져갔다. 그렇게 5년을 지내다가 나는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첫 직장을 그만두고 간 대학원에서 나는 다시 과제를 마주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온‘ 대학원이었지만 대학원 과제는 정말 쉽지 않았다. 매주마다 한 편씩 쓰는 리포트와 소논문을 쓰기 위해 읽어야 할 참고서적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닌 끈기와 인내, 체력으로 하는 거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공부의 벽에 부딪혀 본 후에야 겨우 안 사실이었다. 과제도 과제였지만 졸업논문은 내게 그야말로 커다란 벽이었다. 내용은 어떻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걸 입증할 논리적인 구조가 너무 빈약했던 나는 논문의 얼개를 제대로 짜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석사조교를 하면서 행정적으로 내가 수습을 해야 할 일도 터져버렸다. 규모가 큰 일이었기에 그에 대한 수습을 나 혼자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겹친 나는 논문 졸업이 아닌 비논문 졸업을 택해 졸업논문도 쓰지를 못하고 대학원 생활을 끝냇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숙제나 과제를 하면서 맛봤던 가장 큰 ’실패‘ 였다.


두번째 직장에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다시 ‘일‘ 이라는 숙제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첫번째 직장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두번째 직장의 첫번째 부서에서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두번째 부서로 오자 혹독한 숙제들이 나를 기다렸다. 첫번째 직장보다 시간 제한이 더 빡빡했고 누군가의 돈이 걸린 문제라 절대 실수하면 안된다는 마음이 나를 괴롭혔다. 그 숙제 속에서 나는 매일 악몽을 꿨고 우울은 깊어갔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 퇴근 후에도 업무 단톡방을 들여보며 정보를 찾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런 나날이 이십여 일이 넘자 이제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다 회색빛으로 보였다. 그렇게 들여보던 업무 단톡방도 도저히 볼 마음이 나지 않아 퇴근 후에는 아예 카톡 알림을 껐다. 그 숙제의 괴로움 속에서 나는 다시 초등학교 때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나’로 돌아가거나 중학교 때의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숙제를 내는 나’ 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깊은 나에 대한 회의감과 절망감 속에서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삶‘ 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삶’ 으로 돌아온 나는 그 직장을 그만두는 걸 택했다.


두번째 직장을 그만 둔 이후, 그 숙제들은 내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내 앞에는 진짜 ‘숙제’ 가 있다. 지금까지 내게 주어졌던 누가 내 준 숙제가 아닌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숙제다. ‘나를 아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것’ 이라는. 그것에는 누구도 점수를 매기지 않고 누구도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그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무엇을 하며 사회생활을 하든 전에 겪었던 것과 똑같은 좌절을 맛보게 되리라는 걸.


나의 숙제는 ‘이제 시작이다.‘

작가의 이전글 9. 메신저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