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진다. 암막 블라인드가 절반만 가려진 탓에 이미 방안은 밝았다. 손으로 더듬어 베개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5시 54분. 알람을 5시 55분에 맞춰 두었는데 내 몸속 시계도 제법 정확해졌나 보다. 잠드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일정해지면 수면사이클과 잘 맞아 램수면 상태에서 자연스레 잠에서 깨고 훨씬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단다. 불과 1년 전의 나였다면 알람보다 먼저 깬 걸 억울해하며 침대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어보려 애쓰고 있었겠지. 오늘은 일요일, 이제 나는 평일과 주말의 기상시간이 다르지 않은 준 아침형 인간으로 모드 전환 중이다.
침대 턱에 앉은 채로 두 손을 비벼 손바닥에 열을 낸 후 재빨리 눈두덩이 위로 올려 안에서 바깥으로 쓸어내린다. 묵직하고 흐릿했던 눈이 맑아지면서 남아있던 잠도 달아난다. 간단히 세수하고, 로션 바르고 자외선 차단제도 챙겨 바른다. 민낯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칠 경우를 대비해서 스포츠 선글라스 챙기고, 핸드폰 보관용 허리 밴드에 핸드폰을 넣어 허리에 맨다. 현관에는 나란히 놓여있는 두 켤레의 나이키 운동화가 보인다. 왼쪽 것은 5년 전 생일선물로 받아 지금까지 주로 뛸 때만 신었던 회색 나이키 운동화이고, 오른쪽은 어제 남편과 같이 매장 가서 새로 산 새하얀 신상 나이키 러닝화다. 오래된 내 회색 운동화는 신으면 이미 내발에 딱 맞게 볼도 늘어나고 바닥 쿠션도 내 발바닥 모양대로 형태가 잡혀서 그야말로 나만의 운동화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일정하진 않아도 틈틈이 5년 동안 달리기를 해온 내 운동화는 겉은 멀쩡해 보여도 바닥도 꽤 닳아 있었고 쿠션도 굳어 딱딱해져 있었다. 40년이 넘게 써 왔고 앞으로도 그만큼 더 써야 하는 내 발과 무릎은 소중하기에 운동화는 정기적으로 바꿔줘야 한다. 남편과 함께 고른 새하얀 신상 나이키 운동화는 발바닥 아치 부분이 움푹 파여 내디딜 때 바닥이 유연하게 느껴졌고, 뒤꿈치 부분의 쿠션감도 적당했다. 옆에 있던 남편이 너무 푹신한 건 달릴 때 오히려 방해가 된다며 그래서 나이키 러닝화에는 그 유명한 에어가 없다고 했다. 어디 하나 발에 걸리적거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커팅되어 있는 정교한 디자인에 혼자 새삼 감탄한다. 이 새 운동화를 신고 오늘 첫 달리기다.
오늘 달릴 집 근처 공원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새 운동화만큼이나 가볍다. 공기는 더없이 상쾌하고, 아직은 살짝 차가운 공기가 뛰기에는 더 좋다. 공원 둘례는 대략 1.4km, 오늘 목표는 5km이니 한 3바퀴 반을 돌면 되겠다. 걷다가 뛰기 직전에 내딛는 발걸음은 언제나 긴장된다. 가장 몸이 가벼울 때이면서도 관성 없이 온전히 나의 의지로 내 몸을 가속시켜야 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쯤이 되니 숨이 차고 속도는 처음보다 느려지지만 마지막까지 뛸 수 있는 내 속도를 찾게 된다. 내가 움직여서가 아닌 발이 알아서 땅을 디뎌 밀어내고 다리가 올라와 앞으로 나아가는 이 절묘한 리듬에 내 호흡이 적응되어야만 한다. 3km 정도까지는 다리가 아파서 힘들기보다는 호흡조절을 못해 숨이 차서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2바퀴째를 거의 다 뛰어가는 즈음 양쪽 발바닥 안쪽 날부분에서 뜨끈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뿔싸, 물집이 생긴 것이다. 새 운동화 탓인가.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결국 맞춤이 아닌 기성품의 한계인 것인가. 사실 내 발은 발바닥 아치 부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완만해서 평발까진 아니지만 오래 걷거나 뛸 때 이 부분에 자주 물집이 잡히는 편이다. 한번 물집이 잡히면 마찰이 계속 생기기 때문에 뛰는 동안 점점 더 커진다. 하지만 뛰는 것을 멈췄다가 뛰려면 발바닥에 통증이 더 할터라 이대로 빨리 5km를 완주하기로 했다. 세 바퀴째 돌고 있는데 어제 운동화를 사면서 신나게 설명해주던 매장 직원이 떠올랐다. 러닝에 최적화된 운동화라 그리 자랑은 했는데, 결국 내 발에 물집을 잡히게 했다. 5년 전 지금의 낡은 회색 운동화를 처음 신었을 때도 발등이 조이고 물집은 잡혔었다. 그 전 운동화도 그 전전 운동화도 아마 그랬을 거다. 아무리 좋은 기능이 추가되고 좋은 소재와 디자인으로 만들어낸 운동화도 내 발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그 적응을 위한 첫 시도에는 물집이라는 마찰의 흔적을 남기고, 희한하게도 그 물집이 말라 없어진 이후에는 그 신발을 신고 그 자리에 물집이 다시 잡히는 일은 거의 없다. 발과 운동화가 그새 서로 적응한 거다.
내 발과 운동화조차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서야 내 발에 꼭 맞는 운동화가 되어가는 것인데, 사람 사는 세상은 더 그렇지 않겠나 싶었다. 대립과 갈등, 화해와 공존. 이 거창한 단어들도 결국 내 발과 운동화 사이의 물집과 같다. 뛰다가 생긴 물집이 별 생각을 다 하게 한다 싶다. 물집은 잘 관리하면 덧나지 않고 수포 속 체액이 자연스레 다시 흡수가 되고 마르면 분리되었던 표피가 말라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물집 잡힌 곳에 계속 무리해서 압력이 가해지면 수포 안쪽 피부에 2차 상처가 생기면서 물집 부위는 커지고 깊어지면서 고름이 생기기도 한다. 두 경우 모두 시간 차는 생기겠지만 상처가 다 낫고 나면 더 이상 같은 원인으로 그 자리에 다시 물집이 잡히진 않는다. 피부가 적응을 한 것인지 신발이 내 발 모양에 적응하는 것인지 아마도 둘 다 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나는 전자의 방식으로 내 새 운동화에 적응하고 싶다. 물집이 생겨 통증이 느껴지면 뛰는 것을 멈추고 걷는 걸로 전환해서 멈추지는 않되, 작은 물집이 더 커지지 않고 덧나지 않도록 달래 가며 맞춰가길 원한다. 뛰다 걸어야 할 순간을 놓치고 피고름 나는 사태는 막고 싶다. 경험상 지금은 5km를 다 뛰고 나서 걸어도 될 것 같다. 일단 이번 새 나이키 운동화 적응은 순조로울 듯하다. 더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