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팥 Feb 15. 2022

유효기간

4. 기간 만료


드디어 2024년 2월 28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주인 없는 신용카드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동수는 이제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작은 신카드 한 장에 의지해 살던 지난 4년의 세월이 떠올랐다. 매우 따스했고 포근했던, 돈이 일상을 지켜주던 그 날들. 곧 그리워질 그날들을 떠올리 그는 온몸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 아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카드의 유효기간이 만료되는 날인 2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사랑하는 젤라와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 파인 다이닝에 예약해 특별 코스요리를 먹었고 백화점에 가 그녀가 원했던 명품 가방과 다이아몬드 반지도 하나 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고 너무 좋기도 해 기절 직전인 젤라에게 그는 다정하고 비장하게 말했다.


"너에게, 꼭 한 번은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 아마 오늘 같은 선물을 다시 해주려면 10년이 걸릴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젤라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했다.


"당연히 괜찮지! 난 자기만 있으면 뭐든 괜찮아. 10년 동안 이 가방 너덜너덜 해지도록 잘 들고 다닐게 너무 고마워!"


젤라는 높은 음자리가 날아다니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더니, 커피숍의 테이블에 놓인 색색의 마카롱과 노란 커피잔을 배경으로 가방과 다이아몬드 반지가 주인공인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댔고, 곧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헤시 태그와 결혼, 청혼, 명품가방, 다이아몬드 반지가 뒤섞인 게시물이 올라왔다.


동수는 젤라를 집에 먼저 바래다주고 혼자 코트 주머니에 손을 단단히, 다짐처럼 집어넣고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던 보육원 앞을 지나쳤고, 도시의 작은 쥐가 되어 일했던 편의점 앞에 춰 섰다. 점장은 예전 모습 그대로 밑창이 닳은 운동화를 신고 부지런히 바닥을 닦고 있었다. 동수는 아직도 그대로인 그녀가 조금 측은했다. 그는 조금은 성공한 사람처럼 그녀를 향해 연민의 미소를 지은 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이 카드를 주웠던 버스 정류장로 와 벤치 앞에 섰다.


그는 마치 사랑했던 가족을 떠나보내는 듯한 통증을 가슴으로 느끼며 처음 주웠을 때보다 빛이 많이 바랜 녹색 신용 카드를 정류장 벤치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고맙습니다'를 읊조리며 하늘을 한번 보고 큰 숨을 아주 깊게 들이쉬고는, 사랑하는 젤라가 기다리고 있는 자신만의 따스한 집으로 돌아갔다.


"왔어?"


젤라가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반갑게 동수를 맞이했다. 동수는 젤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고는 있는 힘껏, 꽉 껴안았다.


"이제 세상엔 정말 너와 나. 둘이야. 젤라야."


"왜, 무슨 일 있었어?"


"미국에, 고모가 돌아가셨나 봐. 연락이 왔어."

"어머 그럼 어떻게 해, 너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이미 장례도 다 치렀다고 연락이 왔어. 나 정말 혼자된 거야. 이제 도움받을 데가 정말 없네. 날 돌봐주시던 고모가 돌아가셔서 너무 슬픈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거 같아.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난 이제 졸업도 하고 취직도 했으니. "


"네가 왜 혼자야, 내가 이렇게 네 옆에 있는데."


"그래, 젤라야, 이 세상엔 우리 둘 뿐이야. 나에겐 너 하나밖에 없어. 사랑해, 사랑해 정말"


동수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4년간의 비밀을 마무리했다. 그는 젤라와 함께 뜸이 푹 든, 뜨거운  진밥을 먹고 그녀의 다리를 머리에 베고서  달콤한 잠에 빠졌다. 꿈에서 그는 진짜 미국에 사는 고모를 만났다. 카드의 색깔처럼 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푸근한 중년 여인이 자신을 안아주는 꿈이었다. 노란빛처럼 따스했던 긴 포옹이 끝난 후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흐릿한 실루엣의 고모라는 여자에게 동수는 정중한 인사를 했다. 감사한 온 마음을 담아 그는 허리를 깊게 숙이고는 한참이나 후에 고개를 들어 빛이 가득 담겨 눈이 부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부셔 여인의 얼글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나의 정중한 인사에 대한 격려 혹은 당부 같은 대답을 그는 기다렸다. 분명, 자신이 기대답은 '고생 많았어. 그동안 혼자 잘 견뎌왔구나' 등의 다소 상투적이면서도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그는 곧 머리 앞통수가 조금씩 따가워지는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여자의 흐릿한 얼굴 점점 그의 얼굴로 다가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문을 잔뜩 품은 그 여자의 깊은 주름이 베인 미간이 자신의 얼굴로 바싹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눈을 번쩍 떴다.


"학생, 학생, 일어나 봐, 여기서 자면 어떻게 해. 이러다 얼어 죽어."


동수는 자신을 깨우는 그 중년 여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곳은 카드를 주웠던 편의점 앞 버스 정류장이었다. 진한 녹색 패딩을 입은 아주머니가 동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자의 모습은 미국에 사는 고모의 환영이 아니었다. 바닥에 심장이 내동댕이라도 쳐진 듯 팔딱거리며, 슴이 화끈한 느낌이 들어, 그는 누워있던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젤라는?  나의 따뜻한 전셋집은? 그 포근한 품은! 모두 온데간데없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냉기만 그의 놀란 온몸을 더 차갑게 감쌀 뿐이었다. 동수의 손이 덜덜 떨리고 끝에 멍이 번져가는 것처럼 새 파랬다. 자신이 그런 상태인 줄도 모르는 동수의 더듬거리는 발아래로 식어빠진 삼각김밥이 물컹하게 밟혔다. 그는 주머니에 황급히 손을 넣어 카드를 찾아보았지만 낡은 핸드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의 손가락 간신히 핸드폰을 꺼내어  날짜를 확인했다.


2020년 2월 5일. 자신이 카드를 주웠던 그 날짜에 시간 멈춰 있었다. 그럼 이 모든 게 그냥 꿈이었다고? 그 오랜 시간이 내가 여기서 꾼 짧은 꿈이었다고? 동수는 입을 다물지 못해 반쯤 열어 벌리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에 범벅되었 하얗게 말라 붙어 갈라진 입술 틈으로 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어머, 학생 어디 아파? 왜 이래, 병원에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자신을 깨워준 녹색 패딩의 아주머니가 동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이 여자가 차라리 날 깨우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꿈꿨던 그대로 얼어 죽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동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젤라와 보냈던 첫날밤의 비처럼 후드득후드득.


"제…. 제가……. 흑……. 흑…. 카드가, 카드가 없어졌어요."


동수의 모습에 당황한 중년 여자 녹색 패딩 자락 끝을 잡으며 동수는 서럽게, 아주 서럽게 울부짖었다.


“이런 녹색이었는데, 이런 색깔이었는데. 유효기간이 4년이나 됐었는데. 이제, 이제 저는 어쩌죠? 어떻게 살아요, 어디로 가요...




ㅡ끝ㅡ


매거진의 이전글 유효기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