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육아를 도와주셨던 친정 엄마 덕분에 나는 비교적 수월한 맞벌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딸은 외할머니와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상전이라는 예비 고3이 유일하게 시비 걸지 않고 성질부리지 않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외할머니라고나 할까.그런 딸아이가 설에 갔던 친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자신의 평소 모습과는 아주 정 반대여서 나는 너무 놀랍고도 재미있었다.
'00아, 할머니 쓰는 그거 좀 가져와 그거!'
'응 할머니, 이거 말하는 거지?'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할머니의 '그거'를 우리 딸이 참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것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00아, 할머니 붕붕이 좀 갖고 와 붕붕이.'
'할머니, 여기 여기 있어'
나는 사십 년을 넘게 우리 엄마의 딸로 지냈어도 엄마의 붕붕이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엄마의 붕붕이는 다름 아닌 작은 소형 청소기였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그 풍경이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고 있는데, 그걸 지켜보던 둘째 녀석이 하던 말.
'오~ 누나! 할머니어 1급!'
우리 딸이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도 전에 할머니어 1급부터 땄나 보다. 나도, 딸도 서로를 바라보며 오래간만에 성적 걱정과 부담을 덜어놓고 시원스레 웃었던 날이었다. 우리 아이의 마음을 언제라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외할머니였구나.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짠함으로 물들었다.
올해 고3이 되는 우리 딸은 이제 상전을 넘어서 우리 집 '깡패'의 자리에 이르렀다. 뭐든 자기 마음대로라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그분 마음에 맞춰드려야 한다. 가끔은 속에서 부글부글 천불이 끓어오르긴 하지만 나도 내 성질 팍 죽이고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래 11월까지만 참자 참어. 수능 끝나면 나도 성질 좀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라는 소심한 외침만 가슴속에서 메아리칠 뿐이다.
어쩌면 우리 아이에겐 외할머니라는 존재가 지금의 그 힘든 고3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안전지대가 되어주는 것 같다. 시시때때로 불안하고 힘든 그 오랜 공부 시간도 할머니의 응원과 맛있는 요리 하나면 그야말로 올킬이다. 빨리 수능이 끝나서 할머니와 함께 재미있게 놀러 다니고 싶다는 아이의 바람대로, 올 1년이 무난히 그리고 아이에겐 의미 있게 지나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