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이 어떻게 영업을 해요?"에 대한 대답
올해초부터 마케팅으로 직무를 전환한 이후 8개월이 흘러가고 있다. 점심 먹고 나서 3시쯤 찾아오는 나른함도, 팀장님 몰래 하는 피시 카톡의 즐거움도 다 익숙해졌지만 하나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있다. 사무실에서의 시끄러운 전화 소리다. 나는 내가 통화하는 소리를 누가 들을까 신경이 쓰여서 조금 길어질 것 같으면 복도에 나가서 받는데 다들 자기집 안방에서 통화하는 양 편안해보인다. "부장님~ 잘 지내셨어요? 아이고, 제가 한 번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앞으로 그딴 식으로 하면 다시는 일 같이 못 할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느끼는 건, 내향인에게는 영업이 더 맞다는 것이다. 영업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특히 내가 하던 제약 영업은 의사라는 갑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편하다. 그냥 맞춰주면 되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쌍욕을 퍼붓더라도 원장 앞에서는 그냥 대충 죄송하다고 하고, 조금 무리한 걸 요구하더라도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대충 해주면 된다. 그러면 거래처와의 관계가 유지되고, 매출이 나온다.
물론 그렇지 않은 원장들도 있다.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더 많은 걸 요구하고, 그 요구 사항을 다 맞춰주었는데도 우리 회사와 거래를 하지 않는 원장들도 있다. 너무 성향이 까탈스럽고 다혈질이라 도저히 맞춰주기가 힘든 원장들도 있다. 그러면 버리면 된다. 다음부터 안가면 된다. 어차피 병원은 많다. 하나 없다고 어찌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무직은 다르다. 져주고 맞춰준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싫은 소리를 하고 상대방과 기싸움을 벌여야 한다. 영업할 땐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는데 사무실에서는 해줄 수 있어도 적당히 못하는 척 둘러대야 한다. 영업은 수많은 일대일의 관계를 병렬적으로 다루는 일이라면 사무직은 프로세스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업사원은 많은 거래처들을 담당한다. 하지만 그 거래처들끼리의 관계는 독립적이다. A거래처에서 내가 뭘 했는지 B, C 거래처들은 모른다. 그러니까 눈 딱 감고 그냥 해주면 된다. 내가 조금 귀찮음을 감수하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런데 사무직은, 한 번 해주면 그게 곧 원칙이 된다. 가령 어느 영업 사원이 1인 당 1개 씩만 지급되는 샘플을 특별히 자기한테만 하나 더 달라고 요청했다고 해보자. 내가 이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 소문은 모든 영업 사원들 사이에 일파만파 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음부터 모든 영업사원이 자기도 하나 더 달라고 할 것이다. 거래처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지만 영업 사원들은 같은 영업부서 안에서 정보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호의를 베푼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원칙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사무직은 싫은 소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안 된다, 못해준다, 거래처가 날아가건 인센티브를 못 받건 다 네 사정이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내향인에게는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다. 그냥 죄송하다고 하고 끝내는 게 마음이 편하다. 가뜩이나 영업사원 출신이다보니 "넵, 죄송합니다, 원장님." 하던 게 습관이 되어서 "안 됩니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잘 안 나온다. 그리고 영업 사원들도 수화기 너머로 그걸 느낀다. 앓는 소리하면 적당히 넘어가줄 것 같은 냄새를 맡는다. 그래서 읍소를 한다. 혹은 만만하게 보고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향인은 사무직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