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에서 마케팅으로 직무를 바꾸고 나서 가장 힘든 점 중 하나는 여기서 나는 신입사원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7년차다. 나이는 (바뀐 나이로) 서른넷이다. 대리 말, 인사 고과가 좋다면 과장까지 노려볼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는 그렇지 않다. 내가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전 직장에서 나는 5년 동안 영업 사원으로서 나름 괜찮은 성과를 냈다. 그리고 면접과 자기소개서를 통해 그걸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그러니 이 회사가 나를 뽑아줬고, 영업 사원 출신이지만 마케팅PM이라는 자리에 앉혔을 것이다. 그것도 통상적인 연봉 테이블보다 웃돈을 주고.
하지만 문제는 그 역량은 전 직장이라는 환경, 그리고 영업 사원이라는 포지션에서만 발휘된다는 점이다. 전 직장은 보톡스회사, 현직장은 임플란트 회사다. 취급하는 제품이 다르니 제품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 한다. 보톡스 회사의 주고객은 성형외과 원장들이었으나 임플란트 회사의 고객은 치과원장들이니 고객에 대해서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회사와 전 회사는 주로 쓰는 ERP 프로그램도 다르고, 조직 구조도 다르다. 그 모든 것에 적응해야 한다. 직무도 다르다. 영업은 몸이 부지런하면 된다. 주사위를 던져서 6이 나올 확률은 6분의 1이다. 10번을 던지건 100번을 던지건 그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는 변한다. 60번을 던지면 6이 10번 나오지만 600번을 던지면 100번 나온다. 영업은 그런 일이다. 반면 마케팅은 머리가 부지런해야 한다. 6분의 1이라는 확률을 5분의 1, 4분의 1로 높여야 한다. 똑같이 600번 주사위를 던져도 100이 아니라 120번, 150번이 나오도록.
하지만 회사는 그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웃돈을 주고 직원을 뽑았으니, 그리고 멀쩡하게 영업하고 있던 사람을 마케팅PM으로 데려다 놓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 한다. 마케팅PM으로서는 신입이나 마찬가지라고, 얘가 원래는 이렇게 못하는 애가 아니라고 해도 전혀 감안해주지 않는다. 그럴 거면 그냥 마케팅PM신입을 뽑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월급이라도 아꼈을 것 아닌가.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팀장님이 너는 7년차가 되어서 그것도 모르냐고 하지도 않고, 나보다 경력이 짧고 나이가 어린 팀원들이 나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염치라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에게 인격적 모독을 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그 감사함에 대하여 내가 아무런 보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 아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결과로 보답하는 일일 것이다. 영업 사원이 아닌 마케터로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웃돈을 주고 나를 이 자리에 앉힌 이들의 면이 설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럴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퇴근 후 내 개인 시간에 업무에 대한 공부를 할 의지가 없다. 이 길의 끝에 있는 게 뭔지 알기에, 1년에 200만원 올려줄 걸 250만원 올려주고, 이름뿐인 과장이나 차장직함을 조금 일찍 달아주는 거 외에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을 거란 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