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예감은 왜 빗나가지 않는가

예감

by 김선비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교육 봉사 캠프를 다녀와서 한 달 만에 너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먼저 나와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약속 시간이 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너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물속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너의 머리, 너의 얼굴, 어깨가 하나씩 드러난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머리 모양이 바뀐 것도 아니고 옷도 늘 입던 옷인데,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 마치 다른 사람인 듯 낯설다. 그 순간 나는 직감한다.


아, 오늘 나를 버리겠구나.


하지만 나는 애써 그 직감을 외면했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자신을 달랬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 화제를 돌려보려고도 했다. 교육 봉사 활동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같이 활동했던 사람 흉을 보기도 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불안감이 조금 가시는 것도 같다. 오늘따라 뭔가 잘 웃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역시 내가 헛다리를 짚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너는 말했다. 사실 오늘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바로 다음 순간 내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너를 보지 못했다.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다. 소개팅녀에게 연락을 했는데 답장이 빨리 오지 않을 때, 이번주 금요일에 시간 어떻냐고 물었는데 다른 날짜를 제시하지 않고 그냥 그날은 선약이 있어서 어렵다고만 할 때 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군대에서 실수를 했을 때 영창 끌려갈 줄 알고 마음 졸였는데 막상 아무 일도 안 생기지 않았던가, 회사에서 업무를 잘못 처리했을 때 잘리거나 징계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걸리지도 않고 넘어가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내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정말로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어차피 인간이 하는 걱정의 90%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연애에 한해서는 달랐다. 불길한 예감은 절대 빗나가지 않았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다 맞았다. 왜 그런 걸까? 다른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은데 왜 꼭 남녀 관계에서는 불길한 예감은 다 맞아떨어지는 걸까? 대체 이건 무슨 우연일까?




내가 불안감을 느낀 건, 애초에 우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간파해내는 건 어렵다. 왜냐면 상대방이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감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학생이 시험을 망쳤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그 사실을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우편함을 뒤져서 시험 성적표를 몰래 빼돌리거나, 친한 친구와 아직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을 맞출 것이다. 선생님이 성적표에 부모님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면 몰래 대리 서명을 할 것이고, 부모님 면담이나 통화를 요청한다면 요즘 부모님이 바쁘셔서 어려울 것 같다고 잡아뗄 것이다. 그 밖에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수단을 총동원해서 진실을 숨기려 들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기 어렵다.


그런데 연애에 대한 거짓말은 다르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쪽이 오히려 그 거짓말을 들키고 싶어한다. 앞에서 말한 사례로 돌아가보자. 나는 너에게 잘못한 게 없다. 너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고, 돈을 안 쓴 적도 없고, 교육 봉사 활동에서 만난 다른 여자와 눈이 맞은 적도 없다. 그런데 너는 마음이 떴다.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기로 했지만 너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너와 했던 약속을 어기지 않았는데 너는 어겼다. 너는 내게 잘못을 저질렀다.


물론 최선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 게 제일 나은 길이다. 그렇게 해야 나도 너의 마음을 돌린답시고 헛수고를 하면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긴 어렵다. 너를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무엇 하나 잘못한 게 없는 사람에게 그 모진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너는 거짓말을 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빨리 헤어지고 싶은 너의 마음을 숨긴다. 오늘따라 잘 웃어주고, 교육 봉사 캠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고, 내가 사온 선물을 보고 귀엽다면서 좋아한다.


하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다. 네가 너무 리얼하게 거짓말을 해서 내가 너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어버린다면,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줄 안다면 나는 내일도 모레도 너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할 것이고, 너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또 하루를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건, 거짓말을 하되, 들킬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너는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도, 헤어지자고 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시그널을 준다. 답장을 몇 시간 만에 보내면서 무엇 때문에 연락을 받지 못했다거나,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수요일에는 선약이 있어서 만나기 어렵다고 하면서 다른 날짜를 딱히 제시하지도 않는다. 뭔가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너무 노골적이지는 않되 알아차릴 수는 있을 정도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보낸다. 만약 내가 그걸 캐치한다면 먼저 헤어지자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가 아니라 내가 널 떠난 게 된다. 그러니 너는 미안할 게 없다. 손 안대고 코를 푼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예감을 느낀다면 그 불길함은 십중팔구 맞다. 내가 느낀 불안감의 정체는 단순한 우연이나 나의 예민함 같은 게 아니라 네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보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keyword
이전 09화겸손한 남자는 왜 연애에 실패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