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동폭력의 생존자입니다.
그날 저녁 불현듯 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마른미역의 양을 가늠하다가 생각의 끝이 엄마의 미역국으로 이어졌고 왜 항상 엄마의 미역국엔 미역의 양이 그렇게 많았을까?라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엄마의 미역국에는 항상 미역이 많았다. 미역과 국물의 비율이 5:5 정도. 어떤 상태냐면 국물을 맛보기 위해서는 수북이 담긴 미역을 한참 건져 먹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해도 국에 밥을 비벼 먹는 형국이라서 나는 국물의 양을 늘려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먹기 싫으면 말아.”
그런데 그날 문득 엄마의 미역국을 이해할만한 힌트가 떠오른 거다.
엄마는 우체국 공무원이었던 외할아버지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큰아들 밑으로 딸만 셋을 낳았던 외할머니는 다섯 번째로 아들이 태어난 것을 확인하자 탯줄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엄마를 불렀다고 한다.
산모 몫으로 나온 미역국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 속에는 남동생이 태어날 수 있게 운을 터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앞으로 남동생을 시샘하지 말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당시 네 살이던 엄마가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 미역국의 맛만은 평생을 잊지 못해 하셨다.
다섯 번째 남동생 다음에 또 한 명의 남동생이 태어나서 엄마는 육 남매가 됐다.
말단 공무원의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살림이었을 것이다.
상상을 해 봤다. 한 솥 끓인 미역국을 외할아버지, 큰삼촌, 둘째 삼촌, 셋째 삼촌 순으로 뜨고 나면 건더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다. 그 후에 큰 이모, 작은 이모 그리고 할머니의 국을 뜬 후 딸로는 막내였던 엄마의 국을 뜰 때쯤이면 건더기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엄마는 늘 미역국을 끓일 때마다 미역을 많이 넣으셨던 거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까지 헤집어 보아도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엄마는 친정 식구들과도 왕래가 거의 없었다. 몇 번 뵌 적이 없어서인지 할머니에 대해서 그리 좋은 기억이 없다. 그저 많이 차가운 분이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 손녀에게 따뜻하게 웃으며 안아주는 분은 아니셨던 것 같다. 시집가서 애 키우며 고생하는 딸의 형편을 헤아려주셨던 분도 아니셨던 것 같다. 나의 기억 속에 외할머니는 말 걸기도 어렵고 잘못하면 혼만 날 것 같이 찬바람 쌩쌩 부는 그런 분이셨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을 것이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건 칼바람이 불고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에
외투는커녕 변변한 겉옷 하나 걸치지 못하고 세상 한복판에 내몰리는 것과 같다.
남은 생 동안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고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뼛속에는 늘 한기가 흐른다.
언제나 추위를 타며 살게 된다.
엄마의 미역국을 생각하다 엄마의 어린 시절까지 짐작하게 됐다.
엄마도 많이 아팠겠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엄마에게 묻고 싶다.
부모의 냉대가, 핍박이, 차별이 그렇게 상처가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텐데
왜 나에게 똑같이 대갚음을 하셨던 걸까?
나를 차별하면서
나를 때리면서
엄마는 한 번도 엄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잘못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을까?
나는 이렇게 아파하는데 엄마는 이 마음을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