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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해 Jul 20. 2020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집

                                                

ⓒ새해


팔리는 책만 따라 읽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팔리는 책이라면 무조건 낮춰 보는 것 역시 경박한 일인데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신형철/박준 시집 발문 중 -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박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8) 발문을 쓰면서 첫 번째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2012)의 '예외적인 성공이 그의 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가로막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언급한 그 경박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시집의 제목을 꽤 오래전에 들었다. 그 긴 제목의 시집에 관한 기사가 자주 눈에 띄었지만 내용은 궁금하지 않았다. 베스트셀러 , 시의 부활, 문학계의 아이돌, 기사 제목만 보고 경박하게 지나쳤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시집 두 권을 놓칠뻔 했다.


첫 번째 시집의 표제작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내가 함부로 짐작했던 지독한  연애 시가 아니라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써주던 시절 시인의 이야기였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전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


박준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지금도 누군가 공들여 서정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안도를 느꼈다. 그의 어투는 세심하고 간곡하고 여백이 있다.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제목 속에 시인이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볼까, 보자, 보겠다, 보고 싶다가 아니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에둘러 말하는 태도와, 함께 보고 싶은 게  영화도 아니고 눈도 아니고  장마라는 것.   


시가 무용한 일이라 끌리는 것인지 모른다는 시인의 인터뷰도, 문학을 잘 배우면 다른 이에게 줄 수도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알았다는 시인의  말도 그의 글을 계속 읽고 싶게 한다. 쓸모와 효율이 중대한 가치인 시대에 쓸모와 효율과 전혀 거리가 먼 방식으로  시를 짓고 시를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세상과 조금 동떨어져 걷고 싶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 세상과는 조금 다른 가치를 살고 싶은 의지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천성이 그런 사람. 시는 그런 외로운 사람들의 연대가 아닐까.  


 외롭지? 그런데 그건 외로운 게 아니야 가만 보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외로운 거야 혼자가 둘이지 그러면 외로운 게 아니다  

- 박준/가을의 말(부분)/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문학과지성사 -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 그해 봄에 (전문)/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 장마 (부분)/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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