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을 줄 알았다. 늙어도 아주 천천히 늙을 줄 알았다.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한 나에게 " 너도 늙어 봐라!"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나의 노년을 걱정했다. 늙으면 외로울 거라고.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줄줄이 결혼하고 애 낳고 애 키우고 정신없는 동안, 시댁 가서 만두 빚고 송편 빚는 동안 나는 영화 보고 늦잠 자고 여행 가고 태평한 자유를 누렸으니 늙어서 조금 외로운 건 오히려 공평하지 않은가.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그대들은 늙어서 효도받으시라. 나는 젊은 날의 자유와 추억을 31가지 아이스크림처럼 파 먹으며 고독도 달콤하리라.
늙어도 낡지 않으며 즐겁고 유쾌하게, 품위 있게 늙어가리라! 자신만만했던 나도 똑같이 나이를 먹는다. 한 살 한 살 떡국처럼 먹어 온 나이가 별안간 목에 걸렸다.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졌다. 피부 탄력도 떨어졌고 골밀도도 떨어졌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나지 않는 단어가 급증하고 뭘 찾으러 다니는 시간이 일 하는 시간을 능가할 지경이다. 무리하지 않아도 눈이 아프고 병이 없어도 불쑥불쑥 피로가 찾아온다. 이렇게 나이를 먹는구나! 이래서 은퇴를 하는구나! 요즘 관심사는 온통 나이, 늙음뿐 이다.
잠들면 떠메고 가도 모르던 사람이 중간중간 깨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낯선지. 수면에 방해되는 야식도 끊고 저녁 커피도 끊었다. 끊은 건 그것뿐이 아니다. 전시도 접고 공모사업도 접고 수업도 접었다. 체력과 함께 의욕도 사라졌다. 이렇게 갑자기 늙어도 되나? 싶을 만큼.
인간의 신체가 44세와 60세 등 두 차례에 걸쳐 급격히 노화한다는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의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시간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40대 중반과 60대 초반에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는데 나는 첫 번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탓인가? 두 번째 변화가 수직 낙하처럼 느껴진다. 급격한 신체적 변화 앞에서 하루는 무너지고 하루는 무시하고 또 하루는 제대로 나이 먹을 결심을 한다.
"너도 늙어봐라!" 그 늙음에는 아직 미치지 않았으나 늙음은 가장 가까운 나의 미래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적어도 내겐 통용되지 않았다. 체력의 한계, 소화력의 한계 같은 걸 매일매일 깨닫는 건 비극이 아닐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 내려놓고 드디어 간명 간소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도 만만치 않다. 너무 집요하거나 무거워서 자발적으로 내려놓을 수 없었던 어떤 의미, 책임감, 욕구, 욕망들도 잘 나이 들어가기를, 느슨하고 가벼워지기를!
젊음 연장을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 조금 물러서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찬찬히 나이 들고 싶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한 번뿐인 인생. 죽음은 자주 생각했지만 늙음은 자주 생각하지 않았다.